지중해의 고요한 물결만 보다 그래도 물결치는 파도가 있어 시원한 크레타섬에 내리는데 기항지 투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 원래 내 방식대로 그냥 발광(발관광)하기로 했다.
내리니 예쁜 아가씨가 다가와서 트레인을 타라고 한다. 여행자들이 타는 앙증맞은 꼬마 열차인데 7유로밖에 안 하니 그걸 타고 둘러보기로 하는데, 그냥 동네 한 바퀴가 아니라 중간중간 가이드가 설명도 해준다니 더욱 좋았다. 크레타섬에서 볼 것도 많은데 오늘 돈 벌었다 하며 기분 좋게 탔다.
옆에 앉은 캘리포니아에서 온 할아버지는 85세라는데 너무 정정하시다. 같이 사진도 찍고 명함도 주는데 할머니랑 두 분이 초긍정 마인드다. 두 분을 보니 나는 70세까지만 해외여행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는데 더 연장해서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은 기항지 투어상품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개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연세 드신 분이 그렇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니 더 좋아 보였다.
할머니랑 메일 주소를 주고받다 내 메일 아이디가 영어로 불꽃이라 흥미롭다 하시기에, 인생은 잠시 명멸하다 가는 불꽃놀이니 그렇게 지었다 했다.
인생은 지금 여기, 카르페 디엠으로 살다가는 게 답이라 했더니, 자기랑 딱 맞는 생각을 한다며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소통개백로(疏通開白路, 소통은 백 개의 길을 연다)의 시원함을 느낀다.
잠시 꼬마 열차에서 내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데, 카롭스란 나뭇가지를 잡아 열매를 따서 먹어보라고 한다. 알제리, 모로코 등에서도 생산되는 열매인데 설탕보다 당도가 10배나 되고 먹으면 말도 흥분한다고 한다.
일행 중 한 아저씨가 따 먹고는 흥분한 척하면서 “Where is my wife?” 해서 한바탕 또 웃었다.
헤라클리온
헤라클리온(Heraklion, 이라클리오)은 ‘헤라클레스의 도시’란 뜻으로 크레타섬의 주요 도시다.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로마보다 앞선것이 그리스 문명이요 그리스 문명의 모태가 크레타섬이라 배웠는데, 그 미노아 문명이 기원전 2천 년 경에 크레타섬 중심으로 일어난 그리스 문명의 효시다.
미노아는 미노스 왕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미노스의 아버지는 그리스신화의 최고 신인 제우스이고, 어머니는 페니키아의 공주였던 에우로파(Europa)이다. 유럽이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고대 유물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에 갔더니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은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것들로,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된것들이다. 크노소스 궁전은 야외라서 훼손될까 봐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수천 년 전, 도기에 채색을 하고 문양을 새겨 넣어 그릇으로 사용하고 장신구를 아름답게 만들어 치장한 것을 보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대리석 조각의 옷 주름을 보며 찬탄하고 프레스코 벽화 그림의 색채감과 입체감에 놀란다.
그런데 길거리 기념품 가게를 보며 첫 번째 드는 생각이 ‘아니, 터키 물건이 왜 여기 와 있지?’였다.
크레타는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고 무역 거점지였는데
남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동쪽에는 이란, 북쪽에는 터키 등 강대국들과 가까워 침략이 잦았다.
9~10세기에는 백 년 이상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아랍 무역상들이 비잔틴 동로마제국으로부터 크레타섬을 받아 성을 만들고 그들의 왕국을 건설했다.
이후 에는 베네치아가 400년, 터키가 19세기 말까지 지배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오랫동안 그리스정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했다. 1913년 그리스로 통합되고 나서야 무슬림들은 터키로 이주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니 음악이나 그릇의 문양 등 그리고 터키에서 본 파란 눈 같은 것들이 기념품 가게에 즐비했다.
자유인 조르바
그리고 여기 와서 또 놀랐던 것은 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인조르바》가 바로 크레타섬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고, 안소니 퀸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도 대부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몇 년 전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I hope nothing.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I fear nothing.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So I am free. (나는 자유다.)
바랄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기대도 집착할 것도 없을 때
자유롭다
조르바처럼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기에 그의 묘비명이 그리 깊이와 닿았나 보다. 그의 이름을 따서 크레타섬 공항명도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이다. 그의 무덤과 박물관도 헤라클리온에 있는데 크루즈승선 시간을 지켜야 해서 못 간 게 못내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항구 쪽에 있는 베네치아 요새에 가 봤다. 1204년 베네치아는 비잔틴 동로마제국으로부터 헤라클리온을 사들여 거대한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른바 크레타 르네상스가 펼쳐졌다. 베네치아가 지은 요새는 벽 두께가 최대 40미터에 이르고 항구까지 이어진다. 베네치아 시대에 만들어진 분수도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암튼 콜로세움을 비롯하여 이 미친^^ 이태리사람들의 건축이란!!^^ 놀랍지요 ~ 하며 둘러보았다.
▶ 베네치아 요새를 엄청나게 튼튼히 지었다. 이탈리아는 건축 기술이 대단한 것 같다.
▶ 올리브나무를 깎아 만든 수공예품이 많다.
▶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 그리스 조각을 닮았다 하니 웃으며 포즈를 취해 주었다. 어색한 그의 미소를 보며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