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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ESPR이 바꿀 패션산업의 미래

지속가능성— 이제는 '법‘과 ’규제‘로

by 다다정



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전제’가 되었다.
그동안 캠페인이나 브랜드 마케팅에서 소비되던 ‘친환경’은, 이제 법과 규제의 언어로 전환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ESPR이다.




ESPR(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
ESPR: ‘지속가능성’을 설계에 포함시키는 법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으로 유럽연합(EU)이 제안한 새로운 차원의 제품 규제 프레임워크다.
제품을 더 오래 쓰고, 더 잘 고치고, 더 쉽게 재활용할 수 있도록 — ‘설계 단계’부터 지속가능성을 법적으로 요구하는 규정이다.


ESPR은 기존에 에너지 소비 제품에만 적용되던 에코디자인 지침(Ecodesign Directive)을
모든 주요 소비재로 수평 확대하는 규제다. 핵심은 단순한 제품 개선이 아니다.

‘지속가능성’ 자체를 제품 설계의 강제 요소로 삼는 것이다.




ESPR @European Commission


@da.dajeong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법적 기준이 된다:


- 제품 수명 연장 가능성

- 수리·업그레이드 용이성

- 재활용 원자재 사용률

- 유해물질 포함 여부

-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통한 정보 공개 의무화

*DPP는 제품의 전체 생애주기—제조, 유통, 수리, 재활용까지—를 디지털로 기록하는 시스템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국제환경규제 기업지원센터


즉, 단지 ‘친환경 소재’를 썼다는 말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가?” “폐기 후 어떻게 순환되는가?”
이제는 이 모든 질문에 데이터로 답해야 한다.




섬유 산업이 첫 번째 대상인 이유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and Energy Labelling Working Plan 2025-2030 발췌 @da.dajeong



ESPR은 모든 제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EU는 제품군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있으며, 섬유(Textile & Apparel) 산업이 첫 타겟이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높은 폐기율과 짧은 제품 수명
 EU는 매년 700만 톤 이상의 섬유 폐기물을 발생시키며, 1인당 16kg 이상을 버린다.
이 중 단 22%만이 재사용되거나 재활용되며, 대부분은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 복잡하고 불투명한 공급망
 원자재 채굴부터 염색, 봉제, 유통까지 수많은 하도급과 위탁이 글로벌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 환경적 영향
 패션 산업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10%, 폐수 발생의 20%를 차지한다.
마이크로플라스틱, 염색 폐수, 과잉생산 등 다양한 환경 문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 소비자와의 근접성
 우리가 매일 입는 옷이기에 정책의 사회적 파급 효과가 크고, 인식 전환의 상징성이 있다.



ESPR Timeline @TuV Sud


이러한 이유로 EU는 섬유 산업에 대해 2027년경부터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의무화할 계획이다.

즉, ESPR에 맞추지 못하면, 유럽 시장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현장에서 느낀 국가별 대응의 차이


신기술 신사업 TBT 포럼 @da.dajeong


2025년 7월 17일, 산업통상자원부와 TBT 종합지원센터가 주최한
‘기술규제(TBT) 포럼: 에코디자인 & 배터리’에 참석했다.


이 포럼은 EU의 ESPR, DPP뿐 아니라 각국의 대응 전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였다.


@산업통상자원부 국제환경규제 기업지원센터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각국이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 EU는 규제 주도형으로 ESPR, 녹색 클레임(Green Claims), 지속가능성 라벨링, DPP까지 체계적으로 구축 중이다.

- 하지만 미국은 연방 차원의 규제가 없고, GS1이나 Walmart 같은 대기업 주도로 자발적 파일럿이 진행되고 있다. 클라우드 기반의 데이터 플랫폼 실험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 수출 비중이 크기에 이 부분이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 일본은 정부(경제산업성 METI)가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이 따라가는 방식으로 자동차·전자제품 중심의 DPP 시범 사업을 지원 중이다.

- 한국은 2025~2026년 중 제도 초안을 마련하고, 2027년부터 본격 시행을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섬유 및 전자 분야 중심으로 DPP 적용 기반을 준비 중으로 아직 구체적인 데이터 구조나 제품군 기준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는 국가 간 표준의 불일치, 상호운용성의 문제가 심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공급망이 밀접하게 연결된 산업일수록 비동기적 규제 적용이 무역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중소 제조업체의 적응 부담도 커지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국제환경규제 기업지원센터


포럼 현장에서는 ESPR이 지나치게 엄격하며 준비 기간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유럽연합이 ‘데이터 주권’을 명분으로 산업 통제를 강화하려 한다는 정치적 해석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는 ESPR의 구조적 맥락을 놓친 단기적 시각이다.

유럽연합은 이미 2015년부터 ‘순환경제 행동계획(Circular Economy Action Plan)’을 기반으로 일관된 규제 로드맵을 추진해 왔다.

2020년 제2차 행동계획에서는 ‘지속가능한 제품의 설계를 통한 자원순환’을 가장 핵심 전략으로 명시했고, ESPR은 그 핵심 수단이다.


게다가,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경고는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2023년 기준 지구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 1.48°C 상승했으며, 유엔 IPCC는 2030년까지 1.5°C 한계선을 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한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는 폭염, 산불, 생물다양성 상실은 현재의 조치가 ‘부족했다’는 증거다.


ESPR은 단순히 제품 설계에 개입하려는 규제가 아니다.

2050년 기후중립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한 장기적·구조적 전환 전략의 일환이다.






ESPR 그리고 DPP
국가와 국가 간, 기업과 기업 간, 브랜드와 사용자 간
기준과 데이터, 철학과 방향을 정렬하는 것.


‘지속가능성’이라는 전 지구적 패러다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책임이 모든 이해관계자 (Stakeholders) 요구되는 시점이다.


패션은 언제나 빠르게 변화해 온 산업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전환할 수 있는 산업이기도 하다.


ESPR은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미래 시장을 위한 기준으로
브랜드와 제품 설계, 나아가 기업의 정체성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기회다.

우리는 데이터를 구조화하고 그것을 신뢰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도 이제 단순한 규제 대응을 넘어서,
이 변화를 새로운 경쟁력 확보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CARE ID


한국의 디지털 제품 여권 서비스 플랫폼인 CARE ID (https://careid.center)는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EU의 CIRPASS-2 전문가 그룹에 참여하여 국제 표준 제정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가장 신속하게 국제 규제와 시장 요구사항을 반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CIRPASS-2는 EU의 정책 목표 실현을 위해 다양한 산업에서 디지털 제품 여권(DPP) 도입을 촉진하는 공공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지금, 그 전환의 시작점에 서 있다.



패션은 늘 변화를 이끌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더 느리게 만들고, 더 오래 입고,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제품.
그것이 규제를 넘어선 지속가능한 패션의 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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