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의 박사 준비와 사회적 기업
30살이 되기 전, 나는 내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18살의 나는 패션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전혀 몰랐고
그저 멋진 옷을 만들며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패션 산업을 경험하며,
대량생산, 과잉 재고, 그리고 자원 낭비가 얼마나 뿌리 깊은 문제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목표는 단순한 ‘브랜드 론칭’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패션 산업의 재구조를 할 수 있는 해답을 찾기 위해 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대형 맞춤복 시스템을 설계하며
DADA 프레임워크를 개발하고 사회적 기업 ‘다다(DADA)’를 구상했다.
‘다다(DADA)’의 시작
‘다다(DADA)’는 사실 영국이 아닌, 한국 창업진흥원이 주최한 예비창업패키지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시작됐다.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졸업 후,
나는 국내에서 잠시 디자이너로 일하며 영국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예비창업패키지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눔 가게(Charity Shop)에서 판매되지 못한 재고를 패션과 예술로 되살리는 창업 모델을 제안했다.
실제로 사회적 기업 ‘숲스토리’와 협업해 판매되지 않는 재고를 업사이클링(upcycling)했고 창업진흥원 우수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창업진흥원 측에서는 사업을 계속 이어가길 바랐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업사이클링의 한계를 뚜렷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소재와 사이즈 제약이 컸다.
예를 들어 다다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의복을 구매하기 원하던 고객들이
사이즈 문제로 구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또한 업싸이클링의 친환경적인 후가공을 위해 천연염색을 하더라도,
원단 자체가 합성소재이거나 정체불명의 혼합 소재라면 수명을 잠시 연장할 뿐,
결국, 폐기 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디자이너로 취업이 확정된 상황이었기에,
더 많은 현장 경험을 쌓은 뒤, 다시 이 아이디어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래서 ‘다다(DADA)’는 내게 아직 풀리지 않은 과제가 되었다.
나의 프로젝트를 들은 석사 튜터들은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 모델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해 주었고,
‘다다’는 자연스럽게 나의 연구 주제와 연결되었고 현대 비스포크(Modern Bespoke)를
‘다다’ 모델과 결합해 비즈니스로 구체화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핵심 질문은 동일했다.
한정된 자원을 사용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아이러니보다,
이미 존재하지만 책임 없이 생산되어 재고나 폐기물이 된 자원을 어떻게 다시 쓸 수 있는가였다.
이후 미국의 사회적 기업 경진대회 Hult Prize에 참가했고, 보스턴 서밋(Boston Summit)에 참여하며
개념 검증(Proof of Concept, PoC) 단계로 영국에서 ‘다다(DADA)’의 상표 등록까지 마쳤다.
그 과정에서 현대화 맞춤 제작 시스템(Modernising Made-to-Measure, MMTM)을 위한 프레임워크 또한 구체화되었다.
맞춤형 생산, 텍스타일 폐기물 활용, 지역 기반 협업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하는 이 방식은
과잉 생산을 줄이고, 다양한 체형을 포용하며, 지역 경제를 지원하는 순환 시스템을 지향한다.
‘다다(DADA)’를 단순히 브랜드로 전개하기보다, 누구나 채택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로 만들고 싶었다.
비즈니스 아이디어라는 이름으로 독점하기보다 오픈 소스(Open Source)로 공개해,
누구나 활용하고 현장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산업 현장에서는 이런 실험을 시도할 여유가 없고,
그렇다고 이론으로만 남겨두면 적용 범위에 한계가 생긴다.
그래서 박사 프로젝트를 통해 다다 프레임워크를 연구와 검증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 ‘다다(DADA)’를 운영하며 실제 시장에서 적용하기로 했다.
즉, 다다는 박사를 통해 ‘현장 검증 단계(Field Testing Stage)’로,
사회적 기업은 그 결과를 현장에서 실현하는 장으로 삼아,
연구와 비즈니스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졸업생 사회적 창업 프로그램: LSV
런던은 사회적 가치 기반 스타트업의 생태계가 활발한 도시로 다양한 펀딩과 사회적 기업 경진 대회가 있다.
나는 UAL(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졸업생으로서
런던 소셜 벤처(London Social Ventures, LSV)라는 프로그램에 참여를 추천받았다.
LSV는 런던 내 10여 개 주요 대학이 함께 운영하는 사회적 벤처 지원 이니셔티브로,
사회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중심에 둔 창업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지원한다.
프로그램은 세 단계로 운영된다.
• Spark 단계: 사회적 벤처의 기본 개념과 사례를 배우고, 아이디어를 다듬으며 네트워크를 형성
• Build 단계: 약 한 달간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여 실행 가능한 사업 모델로 발전, 선정 시 초기 펀딩(£2,000)과 멘토링 제공
• Catalyst 단계: 이미 시작된 프로젝트가 시장에서 자리 잡고 확장할 수 있도록 법인 설립, 성장 전략, 투자 유치 지원
LSV는 UAL을 포함한 파트너 대학의 재학생·교직원·졸업생 모두 참여 가능하며,
UAL이 아니더라도 해당 네트워크의 다른 대학 출신이라면 문이 열려 있다.
이 덕분에 다양한 배경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경험을 교환하며 협력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다다(DADA)’의 PoC 단계를 거쳤기에 LSV-Build 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한 달 동안 매주 2시간씩 진행되는 온라인 워크숍 시리즈로, 사회적 기업 창업의 기초를 다지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배운 점은 ‘사용자(Users)’, ‘고객(Customers)’, ‘수혜자(Beneficiaries)’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이 구분은 투자자나 협력 파트너와 대화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한 단락으로 소개할 수 있는 템플릿 (파란색글씨)을 아래처럼 제시했고,
이를 통해 복잡한 다다의 시스템 구조를 아래와 같이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Our Modernising Made-to-Measure (MMTM) fashion system helps individuals who want well-fitting garments and sustainable alternatives to mass fashion, by enabling on-demand, personalised production using textile waste and fostering local collaboration to support a circular economy, unlike ready-to-wear fashion, which drives overproduction and excludes diverse body types.
약 한 달간 이어진 프로그램이 끝나고, 현장에서 진행하는 파일럿 프로젝트 발표 날 — 발표는 바이오 이노베이션 센터에서 열렸다.
5분 안에 브랜드 소개와 펀딩 사용 계획까지 담아야 했기에,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고 핵심만 남겼다.
그렇게 4분 30초짜리 대본을 완성했고,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외웠다.
나의 순서는 마지막이었고, 다른 팀들의 발표가 이어질수록 마음이 점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발표 직전 10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져, 그 짧은 순간 동안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았다.
발표가 끝났을 때 심사위원들은 “자료와 내용이 완벽하다”,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라는 피드백을 주었고
긴장됐던 마음과 걱정들이 한 번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발표가 끝나고 우연히 근처에 찾게 된 친환경 코워킹 카페를 방문했다.
날씨도 좋았고 갓 만들어진 건강한 샐러드의 맛도 좋았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LSV 측에서 일주일 이내 펀딩 결과를 발표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연락을 취했고, 다행히 ‘다다’가 펀딩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정 이후에도 작성해야 할 서류들이 있었고, 바로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했지만 다시 긴 기다림이 이어졌다.
문제는 나의 비자였다.
나는 박사과정을 하게 되면 학생 비자(Student Visa)를 신청할 예정이었기에
졸업 비자(Graduate Visa)는 별도로 신청하지 않고 방문자 비자(ETA 비자)로 전환했다.
( 한국인은 영국에 90일 이내 단기 체류 시 관광, 친지 방문, 단기 연수 목적으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프로그램 시작 전 미리 방문자 비자로 변경한 상태로 프로그램 참여가 가능하냐고 문의했었고,
LSV 측에서 제한이 없다는 답변을 받아 진행했지만, 결국 이로 인해 펀딩 집행이 몇 달간 지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하는 오늘, 또 다른 비자 관련 추가 요청 이메일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학생 비자를 받기 전까지는 내 펀딩이 잠정 보류(Pending) 상태로 남게 되었다.
Pitch It at UAL
열심히 준비했고, 쏟은 시간과 노력만큼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LSV 이후, 나는 비자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는 ‘Pitch It’에 도전했다.
Pitch It은 UAL 재학생과 졸업 2년 이내의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 경진대회다.
예비창업자나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게 아이디어를 직접 발표할 기회를 주고, 심사를 통해 최대 2,000파운드의 시드 (SEED) 펀딩을 지원한다.
심사 기준은 사회적 가치, 실행 가능성, 그리고 창의성이다.
당시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온라인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지만,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해 온라인 피치 기회를 얻었다.
특히 대회는 2분 발표와 6페이지 분량의 자료로 제한되어 있어 LSV에서 사용했던 기존 대본을 새롭게 수정하고 재구성해야 했다.
팀원인 Beau와 며칠간 열심히 미팅하며 발표를 준비를 하며 큰 힘이 되었고 덕분에 발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발표 후 가장 완성도가 높은 프레젠테이션과 발표였다는 긍정적인 피드백도 받았지만, 결국 펀딩은 받지 못했다.
‘Pitch It’은 발표 스킬보다 실체가 있는 제품 중심의 아이디어를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이번 대회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스피커를 개발한 참가자가 있었는데, 완성도 높은 프로토타입이 인상 깊었고 예상대로 그 팀이 상을 받았다.
‘다다(DADA)’가 제안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완제품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과 구조이기에,
짧은 발표 안에서 그 가치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외국인으로서 런던에서 사회적 기업을 한다는 것
외국인으로서 영국에서 사회적 기업을 한다는 것은 자본이 넉넉하지 않은 이상 쉽지 않다.
하지만 LSV와 같은 졸업생 창업 프로그램, 소규모 파일럿 펀딩, 사회적 기업 특화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면 아이디어를 시장에서 시험해 볼 기회는 충분히 있다.
어릴 때와 달리 ‘거절’과 ‘불합격’을 겪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기회가 생기면 최선을 다한 만큼 매번 에너지를 쏟으니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다.
그런 날, 오래된 친구이자 플랫메이트인 Benny에게
내가 가는 방향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해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몇 번의 실수로 게임을 그만둘 거야? 축구도 경기 종료 전엔 아무도 결과를 몰라. 승부차기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야.”
순간순간 진심을 다하고, 후회 없이 움직인다면, 그 과정이 쌓여 결국 나를 만들어 간다는 것,
실패는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단지 ‘과정’ 일뿐이다.
모든 과정은 기회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젠가 스스로 만든 기회를 통해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Benny의 말이 내게 큰 힘이 되었듯,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전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