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을 다시 바라보다
석사 과정에서 수많은 논문을 읽으며, 리즈 대학교(Leeds University)가 지속가능한 패션 연구의 중요한 거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낯설게만 느껴지던 학교였지만, 논문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한 그들의 연구는 실험적이면서도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단순히 이론적 논의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파트너와 협력해 현장에서 검증하거나 지역 공동체와 함께 지속가능한 패션 실천을 탐구하는 등 ‘실천 가능한 연구(practical research)’를 지향한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영감을 준 한 연구자
그중에서도 Eunsuk Hur 교수님의 연구는 단번에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리즈 대학교 School of Design에서 지속가능 패션 분야의 Lecturer이자 BA Sustainable Fashion 프로그램 리더로 활동하며, 순환경제와 공동설계(co-design), 사회혁신을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특히 그녀의 연구 방법론은 참여자 중심적 접근을 특징으로 하여, 학문적 성과를 넘어 산업과 사회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과 영국을 잇는 맥락 속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내가 찾고 있던 연구 방향을 가장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연구자였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은 지도교수(supervisor)를 찾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확신했고, 용기를 내어 Expression of Interest(EOI), 말 그대로 “나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싶은데, 함께할 수 있을까요?”라는 의향서 이메일을 보냈다.
무작정 보낸 메일이었지만, 그녀는 나의 연구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며 상세한 피드백을 전해주었다. 특히 내가 연구해 온 주제와 유사한 산업들과 리즈 대학교가 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내 프로젝트가 단순한 학문적 시도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박사 과정에서는 연구의 초점을 석사 때보다 훨씬 더 명확히 좁혀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구체적인 연구제안서 작성을 권유했다.
이는 곧 연구 대상 국가와 지역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던 질문이 떠올랐다.
“결국, 한국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 패션 연구를 선택한 이유
나는 10여 년 전 한국에서 패션 커리어를 시작했다. 쇼룸에서, 공장에서,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현장을 오가며 한국 패션 산업을 가까이서 경험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지속가능한 패션’을 깊이 탐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7~8년 전쯤, 네이버에서 ‘지속가능 패션’을 검색했을 때 떠오른 자료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제대로 된 학문적 글은 거의 없었고, 정보도 단편적이었다.
그래서 더 배우고 싶었다.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뉴욕주립대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영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런던컬리지오브패션(London College of Fashion, UAL)에서 패션과 환경을 주제로 석사를 마쳤다. 다양한 영어권 나라에서 경험을 쌓으며 세계적 시야는 넓어졌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늘 한국이 남아 있었다.
여러 영어권 나라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세계적 시야는 넓어졌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늘 한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만든 프레임워크를 한국 패션 시스템 속에서도 실험해 볼 수는 없을까?”
연구 주제를 구체화할수록, 한국 산업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선명해졌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나는 다시 한국을 중심으로 박사 연구 계획을 시작했다.
한국 패션의 양면성
다시 들여다본 한국 패션 산업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한쪽에는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CLO Virtual Fashion 같은 선도 기업, 디지털 친화적인 시장, 그리고 한류가 불러온 글로벌 영향력. 덕분에 가상 샘플링과 디지털 패션 경험은 국경을 넘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한국은 마치 디지털 혁신의 실험장이자, 세계가 주목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약했고, 구매 문화는 여전히 빠른 트렌드 중심으로 움직였다. 한국 특유의 ‘빠른 속도’가 혁신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이 안에서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겼다.
환경과 윤리에 대한 인식은 분명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실제 구매 단계로 가면, 많은 이들이 여전히 심미성과 트렌드를 우선시했다. 매장 진열대에 걸린 화려한 신상품 앞에서, 실천은 늘 한 발짝 늦춰졌다. 이는 개인의 의지로만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산업적 지원과 제도적 기반이 함께 구축될 때 비로소 윤리적 패션이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섬유·의류 제조업은 구조적 어려움 속에 놓여 있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비용과 낮은 기술 경쟁력은 글로벌 경쟁에서 한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며(Park, 2024), 해외 아웃소싱의 확산은 국내 생산 기반과 장인정신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었다. 이는 지역 기반의 지속가능한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제약으로 작용한다(Chang, Kim, & Chong, 2025).
이처럼 한국 패션 산업은 디지털 혁신과 문화적 영향력에서는 세계적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지속가능성 전환이라는 과제 앞에서는 여전히 많은 고민을 필요로 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연구자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크다고 느꼈다. 한국인 연구자로서의 책임감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사 연구의 무대를 한국 산업에 두기로 결심했다.
박사 연구서를 제출하고 지원 절차를 이어가던 중, Hur 교수님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셨다. 나의 석사 과정 Guest Examiner였던 Dr. Anja Connor-Crabb이 내 프로젝트를 기억하고 있었고, 공동 지도교수(Co-Supervisor)로 함께하겠다는 제안을 전해온 것이다.
Dr. Connor-Crabb의 연구는 석사 시절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녀는 “수많은 지속가능 패션 프레임워크와 툴이 존재하지만, 왜 산업 현장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단순하지만 뼈아픈 질문은 내 최종 프로젝트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영감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리즈 대학교에서 BA Fashion Design Innovation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내 연구에 동행하게 된다는 사실은 무척 뜻깊었다.
연구서를 제출한 뒤 이어진 인터뷰는 맨체스터 대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발표와 질의응답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화면 속 두 연구자 앞에서 슬라이드를 넘기던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존경하는 이들 앞에서 프로젝트를 설명한다는 사실은 긴장이 컸지만,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했다.
인터뷰 후 받은 피드백은 긍정적이었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제약도 드러났다. 영국 학생비자를 받으면 영국 외 나라의 체류 기간이 제한적이어서, 내가 계획했던 ‘2학년차 현장 연구’ 일정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연구 주제의 타당성은 인정되었지만, 제도적 한계는 연구 방식과 장소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석사 과정에서 만난 두 명의 ‘뮤즈 같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은 내 연구 여정에서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그들의 조언 덕분에 박사 연구의 방향은 점차 선명해졌고, 합격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본격적인 실험 연구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내 마음속에 의문을 남겼다.
한국인 실무자-연구자로서, 내가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유럽은 이미 제도와 규제로 지속가능한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더 쓸모가 있는 곳은 결국 내 나라, 한국이 아닐까?
이런 질문을 품은 채, 다시 한국 산업 동향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검색창에 ‘국내 지속가능한 패션’을 입력했을 때, 생각보다 적은 검색 결과가 떠올라 한동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스크롤을 내리던 중 한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순환 패션(circular fashion)’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며 국내 최초의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만남은 내 연구와 진로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국 석사를 마치고〉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이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