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졸업비자를 신청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고등교육 과정을 졸업한 국제학생들은,
일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Graduate visa(졸업비자)를 신청할 수 있으며,
이는 2년간 영국 내 취업 또는 자영업 활동이 가능한 체류 허가를 제공한다.
*2024년 The Guardian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이 Graduate visa 제도를 제한하거나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으며, 이는 국제학생 유치 및 졸업 후 진로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제도는 특히 영국에서 직업 경험을 쌓고자 하는 유학생들에게 중요한 진로 단계로 활용되어 왔다.
영국에서 예술 및 디자인을 포함한 석사과정은 약 1년으로 로 짧고 집중도 높게 설계되어 있어,
해외 유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로 여겨진다. 나의 석사 과정 역시 1년 반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석사 졸업 후,
나의 주변 동료들은 대부분 졸업비자를 활용해 취업을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길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미 영국에서 지속가능한 패션 기업의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산업 현장에서 수익성이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구조 안에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가치’가 쉽게 우선순위로 오르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석사를 하게 되었다. )
다시 그 구조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현장에서 부딪히며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바로 산업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점점 더 멀어져 보였다.
패션 산업은 늘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이 치열하며,
돈이 모든 결정의 우선순위가 된다. (다른 산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속도와 구조 안에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가치를 실험하고 정착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단기적인 성과와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산업의 언어는,
내가 그동안 배워온 변화를 위한 언어와는 달랐다.
그동안 쌓아온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공부를 단지 이론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다고 판단했고 나는 박사과정이라는 또 다른 길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실험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박사과정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
1년 반의 영국 석사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실질적인 연구에 쏟을 수 있었던 시간은 약 6개월 남짓에 불과했다.
그 안에서 복잡한 패션 시스템의 구조를 깊이 탐구하고
실천적 실험으로 연결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논문 분량도 20,000 단어라는 제한이 있어 연구의 심화 과정이나 복합적인 관계들을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웠다. 석사에서 미처 연결하지 못한 이론과 현실, 실험과 실천 사이의 틈,
그 간극을 좀 더 깊이 있게 파고들고, 잇고 싶었다.
영국은 박사과정이 단순한 학문적 탐구를 넘어서,
사회적 영향력과 실질적 실행 가능성을 기준으로 펀딩 하는 구조가 잘 정비되어 있다.
UKRI 산하의 AHRC, ESRC 등의 기관은
산업과 협업하는 실험적 연구나 사회 시스템에 기여할 수 있는 제안서에
대해 활발하게 장학금 및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자율형 제안서 기반의 펀딩도 가능해서,
연구자의 경험과 기획력이 분명하다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
나는 석사과정을 장학금 없이 시작할 수 없었기에,
입학 전부터 장학금 루트를 철저히 조사했고
추가로 연구제안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실제로 장학금을 받아 입학했다.
그리고 석사를 Distinction으로 졸업했다.
물론, 만약 장학금을 받지 못 받는 다면,
박사과정은 시작할 수 없기에 또 한 번의 도박이다
박사 장학금은 더 쉽지 않겠지만,
가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영국은 제안서 기반의 구조적 연구에 대해
장학금이 비교적 투명하고 정당하게 분배된다는 점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훨씬 더 실질적인 진입로였다.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개척자(pioneer)가 되고 싶냐"라고 물었다.
사실 그런 거창한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 이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이 결정은 단지 논문 속 문장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를 위한 연구를 더 깊이 실험하고,
더 넓게 실제 산업과 연결하며,
실제 구조로 발전시킬 수 있는 다음 단계를 만들고자 하는 선택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이루기 위해 박사 진학을 준비하면서
영국에서 실제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서서히
전혀 다른 길로 나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