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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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

종이에 손가락을 베었다. 순간 따끔한 통증이 스치고, 하얀 종이 위로 붉은 선이 얇게 번졌다.

종이는 가볍고 하찮게 보이지만, 그 얇은 면 하나로도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겉으론 유순해 보여도, 그 안에는 쉽게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숨어 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종이도 함부로 다루면 베이고, 사람도 함부로 대하면 마음이 다친다.


직장에 다닐 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엔 평범한 시골 농부처럼 보였다.

말투도 느릿하고, 옷차림도 수수했다. 하지만 그분이 바로 ○○청장이었다.

기업의 현장 방문 날. 한 기업의 대표가 수행하던 직원을 청장으로 착각하고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진짜 청장이 누구인지 알게 된 그 대표는 얼굴이 벌게져 연신 사과했다.

그때 그분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게 좋아요. 저는 그렇게 보이고 싶었거든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권한이 커질수록 어깨를 낮추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직함이 높아질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걸음걸이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분은 20년 동안 스스로 어깨를 낮추는 연습을 해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낮춤’이란 덕목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달았다.

누군가는 위치를 지키기 위해 올라가려 하고, 누군가는 올라가면서도 낮아지려 애쓴다.

진정한 강함은 후자에게 있다.


겸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자신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으로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머리를 숙인다.

그분의 나긋한 말투와 느린 걸음에는 그런 자기 확신이 있었다.

그의 온화함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평온이었다.


종이가 얇다고 약한 것은 아니다.

그 얇음 속에는 예리함이 숨어 있고, 그 예리함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이 적다고 무기력한 게 아니고, 부드럽다고 해서 약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안다.

요즘은 유난히 목소리가 큰 세상이다.

존재를 증명하려면 계속 말해야 할 것 같고,

눈에 띄지 않으면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그분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떠올리면 마음이 놓인다.

그들은 외양이 아닌 중심으로 세상을 버티고, 말보다 행동으로 신뢰를 쌓는다.


그날 종이에 베인 상처는 작은 교훈이 되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일수록 조심히 다뤄야 한다. 사람도, 관계도,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부드럽게 대하며, 깊이 이해해야 한다.

언젠가 나도 ‘직원처럼 보이는 기관장’이 되고 싶었다.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태도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존재,

어깨를 낮춰 타인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는 사람. 세상은 점점 빠르고 경쟁적으로 변하지만,

진짜 힘은 여전히 온화함 속에 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강함이다.


종이처럼, 얇지만 예리하게,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나는 늘 배운다.

그리고 오늘도 다짐한다.

내가 가진 권한과 지식, 경험이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게 하기를.

세상을 베지 않고도 선을 그을 수 있는, 단단한 종이가 되기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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