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둘레길 순례록(DMZ평화의 길 14코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설렘은 좋다. 그것을 지속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그것을 완결했을 때의 뿌듯함은 그야말로 희열(bliss)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 과정을 즐기면서 견디며, 끝내 정상 경험을 맛보고자 한다. 대체로 시작만 하고 끝을 보지 못한 경우가 많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시작하고 끝을 본 경험이 몇 번은 있다. 그 경험에 힘입어 환갑을 맞은 지금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지난주에 첫걸음을 내디뎠으니 이름하여 “아내와 함께 코리아 둘레길 순례”이다.
방방곡곡을 다 걷고 싶은 마음이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너무 긴 거리와 약한 체력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다행히도 최근 늦은 나이에도 그걸 해 낸 사람을 만나고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이 들어서도 긴 시간을 두고 하면 가능할 것 같다는 계산이 섰다. 코리아 둘레길이 총 284개 코스 4500km니까 일 년에 28개 코스 450km 정도 걸으면 된다. 일 년이 약 50주니까 주말마다 9km, 또는 격주로 18km 이상 걸어주면 된다. 가끔 지리산 둘레길이나, 가고 싶은 산을 걸어주면 한반도 구석구석을 다 둘러볼 수 있을 거다. 가슴이 설레었다. 먼 거리와 약한 체력은 문제가 안 된다. 비책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가려면 천천히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누구보다도 아내와 함께 걷고 싶었다. 아내는 걷기를 좋아하고 나와 함께 다니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 나는 아내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주 많다. 함께 다니면서 그간 내가 받아왔던 것들에 이자 붙여 되돌려주고 싶다. 여행 준비하고, 운전하고, 길 안내하고, 사진 찍고, 짐 들어주고, 간식 챙겨주고, 근육 풀어주고, 우산 들어주고 …. ‘장자’라는 책에 아무리 도(道)를 닦아도 미치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위하여 정성껏 밥을 짓고 돼지를 키우는 사람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처럼 나도 이제 기본으로 되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의 도전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걷는 것은 형식이고, 아내를 대접하는 것은 내용이다.”
시작은 평탄한 ‘DMZ평화의 길’ 14코스에서 했다. 평소 자주 가는 경기도 연천에 있는 길이다. 길의 절반은 차탄천이라는 하천을 따라 걷는 길이고, 절반은 경원선 철길과 나란히 나 있는 길이었다. 강둑을 따라 나 있는 길은 언제 걸어도 시원하다. 강둑 한쪽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다른 한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넓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내가 물과 함께 산천을 굽이쳐 흐르는 것 같다. 그날따라 우리처럼 걷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사람 몇몇 보았을 뿐이다. 이렇게 좋은 길을 우리만 걷다니,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좋은 길을 독차지하는 기쁨이 조금 더 컸다. 넓디넓은 공간에서 단둘이 하나가 된다.
경원선 기찻길과 나란히 난 길은 씁쓸함과 희망이 공존하는 길이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철길 양쪽으로 쳐진 철망 울타리, 끊어진 옛 철교의 잔해, 이런 것들이 걷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이 길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분단의 아픔을 느낀다. 다행히도 철길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흔적도 있었다. 일부 구간은 수리와 보수를 하여 백마고지역까지 전철이 연장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통일이 되어 원산까지도 연장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도중에 역고드름이라는 관광지도 들렀다. 뚫다가 중단된 터널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얼어 역고드름이 생기는 곳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전쟁 목적으로 파다가 중단된 것이기에 씁쓸하기는 했지만, 순례길에 들리는 기억 공간으로 조성됐으니 이 또한 희망적이다.
첫 순례길이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설렘과 씁쓸함,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아내와 함께 ‘한 걸음조차 내디딜 수 없을 때까지’ 동행할 거리를 찾은 것이다. 우리의 여정이 늘 처음처럼 풍성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