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사회생활에 똥을 밟은 걸까
둘째를 임신해서 퇴직한 후 일자리를 다시 얻을 수 없었다. 해외살이를 시작하며 기초적인 영어실력으로 하루 4시간씩 일할 수 있는 작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를 뽑아준 이 빵집의 매출이 쭉쭉 오르게 돕고 싶은 마음과 첫 출근의 설렘을 안고 출근 시간보다 15분 일찍 베이커리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계산대 뒤 작업장에서 빵 반죽을 하며 두 손이 바쁜 사장님은 밀가루 포대가 잔뜩 쌓여있는 작은 방을 턱으로 가리키며 어서 들어가 앞치마를 입으라 했다. 밀가루 포대 옆에 걸려있는 축축한 앞치마를 입고 나가니 싱크대의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하면 된다고 한다. 갓 나온 빵을 식혀두는 구멍이 송송 뚫린 쟁반들과 오븐에 들어가는 크고 무거운 쟁반들, 버터와 생크림이 잔뜩 묻어 미끌미끌한 베이킹 도구와 주걱들, 홀에서 음식을 먹고 간 그릇들과 각종 컵, 그리고 곰팡이가 가득 핀 하얀색 도마.
빵이 완성됐다는 삐삐삐삐~ 오븐의 알람소리에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장님에게 고무장갑이 어딨는지 묻는 것도 실례가 될까 맨손으로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묻혀 설거지를 시작했다.
싱크대는 좁고 모든 쟁반들은 크고 무겁다. 깨끗하게 씻어놓은 각종 쟁반들을 놓아둘 곳이 없어 물이 빠지게 세워놓았다. 사장님은 내가 설거지할 때 주변에 물이 튀고 그걸 자신이 밟으면 미끄러져 뼈가 부러질 수 있으니 내가 책임지기 싫으면 조심하라고 한다. 물이 그렇게 많이 튀었나 살펴보려 바닥을 보니 물방울보다는 새까만 개미떼들이 바글바글하다. 순간 너무 놀라 내가 본 것이 개미가 맞는지 고개를 돌려서 다시 보려 하자 쉬지 말고 일을 하라고 사장님이 호통을 친다.
목을 잠깐, 2초 돌린 게 쉬는 건가?
호통? 그냥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지른다.
왜 저래?
이곳은 60대 한인부부가 운영하는 빵집이다.
단팥빵, 인절미빵, 고구마빵, 맘모스빵 등 주로 한국스타일의 빵을 만들고 한인이 주 구매자다.
나의 면접을 본 그녀는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항상 머릿수건을 쓰고 있으며 팔토시를 한 마른 체형으로 늘 인상을 쓰고 있다.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를 빽! 빽!! 자주 지르고 자신을 사모님으로, 남편을 사장님이라 부르란다.
사장님은 주로 빵 반죽을 만드는 큰 기계 앞에 서있는다. 밀가루포대를 옮겨와 반죽기에 붓고 다른 여러 가지의 파우더를 섞는데 그때마다 사모님은 사장님께 가루 흘리지 마라, 가루 날리지 마라 오만 신경질을 다 부린다. 밀가루를 붓는데 어떻게 가루가 안 날릴 수 있냐고 같이 소리를 지르는 사장님 때문에 혹시라도 작업장 밖의 손님이 들을까 마음 졸이는 건 아르바이트생인 나뿐이다.
홀에는 주로 계산을 하는 사장부부의 20대 아들이 있는데 덩치가 크고 게을러 점심 무렵에 사모님이 전화를 걸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잠을 깨워야 1시간 뒤쯤 빵집에 일을 하러 온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계산대 뒤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이어폰 없이 핸드폰으로 게임유튜브만 본다. 내가 지나가도,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는다. 사모님은 작업장에서 핸드폰으로 한국말이 나오는 목사님의 성경말씀을 크게 틀어놓고 밖에선 아들이 영어로 말하는 게임방송을 크게 튼다. 역시나 손님이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건 아르바이트생인 나뿐이다.
4시간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일을 했다. 고개를 2초 돌린 것에도 쉰다고 표현하는 그 가게에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되는 시간은 없었다. 빨리빨리 설거지를 하라는 말에 마음이 급해져 맨손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나중에 사모님은 고무장갑을 던져주었다. 앞치마에 슥슥 손을 닦고 고무장갑을 끼니 두 번째 손가락에 구멍이 나있다. 구멍 난 고무장갑을 껴봐야 물에 손이 젖는 건 똑같으니 고무장갑을 사모님 가까이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내가 버린 고무장갑을 주어 온 사모님은 왜 멀쩡한 걸 버리느냐고 소리를 질러댄다. 구멍이 났다고 말해도 멀쩡하다고만 한다. 사모님은 쓰레기통에서 꺼낸 고무장갑을 싱크대 밑 청소도구가 담긴 파란색 바케스에 구겨 넣고는 손도 씻지 않고 빵의 반죽을 만진다.
이제 정리하고 가라는 시간을 보니 원래 퇴근시간보다 20분이나 지나있다. 15분 이른 출근을 했는데 통성명도 없이 빨리 들어와 앞치마 입고 일을 시작하라더니 끝낼 땐 20분을 넘겨 퇴근하란다. 시계를 보니 아이들 하교시간이 30분 남았다. 마음이 바빠 잰걸음으로 나가려고 하니 사장님이 나를 불러 세운다.
"뉴질랜드에는 트라이얼(trial)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거 알죠? 사장이 일주일 일을 시켜보고 일을 못하면 자를 수 있어요. 원래 다른 가게는 그 트라이얼 기간 동안 일을 해도 돈을 안 주는데 우리는 그런 나쁜 사장은 아니니까 돈은 줄 거예요. 그래도 만약 일을 시키는데 일을 못하면 나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니 알아두라고요. 나중에 딴 소리 말고.. 아, 그리고 토요일에도 나오세요. 그게 싫으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고요. 저희는 주말에 일한다고 해서 1.5배 더 주거나, 계약서를 쓰거나 하는 건 귀찮아서 안 해요. 그런 거 하자는 소리할 거면 그냥 딴 데 가세요."
나는 전날 면접에서 초등생 아이가 두 명이 있어서 토요일 근무는 어렵다고 분명히 말했고, 사모님은 “상관없다. 일손이 필요하니 평일에만 10시부터 2시까지 4시간 일을 해주면 된다”라고 했다. 오늘 짧은 시간 동안 일을 하며 근무조건은 좋지 않지만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로 가까우니 토요일에 아이들은 남편과 같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급한 마음에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나왔다.
아이들을 픽업하러 걸어가며 아까 들었던 사장님의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그냥 알아두라는 거지만 본인이 말한 지침이 싫으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란다.
오랜만에 겪는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 속에 협박성 멘트도 섞여 있다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내가 일을 오래 쉰 탓에 별게 다 고깝게 여겨진 건 아닌지..
나도 좀 유연하게 생각하자 싶었다.
내일은 물 튀기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게 설거지를 잘해보자 생각한 나였다.
(아.. 이때 그만뒀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