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들어온 적 없던 입력값이 0인 그들
해외살이, 이민을 결심한 사람치고 현실에 안주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민’이라는 꿈을 안고 청정국가 뉴질랜드로 정착을 결심한 사람들, 어떤 이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이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어, 어떤 이는 복잡한 한국을 벗어나고자, 어떤 이는 가장의 공부와 직장 때문에..
각자 이유는 달라도 '뉴질랜드'라는 나라 안의 한국사람으로 우리는 지금 모두 빵집에서 일한다.
사장님이 말한 일주일의 트라이얼 기간이 지났고 원래는 하지 않기로 되어있던 토요일 근무까지 마쳤다. 내가 받기로 한 급여는 최저시급으로, 주말에 일을 했어도 1.5배는 쳐주지 않았고 계약서는 없다. 어차피 하루 4시간만 일을 하고 매주 주급을 받으니 만약 그 주 급여를 주지 않으면 바로 퇴사하면 되지 싶었다. 계약서 쓰는 것도 귀찮으니 자기 말 듣지 않을 거면 관두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첫 출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옷을 만져보니 티셔츠 앞부분이 젖어있고 시큼한 냄새도 나는 것이 찝찝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며 앞치마가 젖고 잘 말리지 않은 상태로 다음날 또 누군가 사용하다 보니 내 옷에도 그 냄새가 밴듯하다. 다음날 집에서 내가 쓸 앞치마와 티타월, 마실 시간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물병에 물을 넣어 챙겼다.
나는 항상 출근시간보다 10분, 15분 일찍 가게로 나갔지만 밀가루 포대가 사방에 잔뜩 쌓여 사람 혼자 서있기도 좁은 작은 골방에서 앞치마의 리본이 허리에 제대로 묶이지 않아 다시 묶는 20, 30초의 시간도 사모님은 용납지 않았다. 빨리 나와 일하라는 사모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어김없이 들어야 했다.
작은 골방에는 겉옷을 걸어둘 공간이나 행거는 당연히 없어서 밀가루가 쌓인, 제일 나중에 사용할 것 같은 포대 위에 가방과 함께 잘 접어놓지만 4시간 동안 소복이 쌓인 밀가루 먼지는 가게 밖에서 옷들을 탈탈 털어도 밀가루의 자국은 그대로 남았다. 그래서 큰 비닐봉지를 준비해서 가방과 겉옷을 넣고 묶어 골방 구석 바닥 한켠에 내려놓았다. 매일 그 행동을 반복하니 첫날보다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1, 2분은 더 걸렸다. 그것을 감안해 15분 먼저 빵집에 도착했고 일의 시작시간은 10시지만 9시 45분에 출근을 한 거면 그때부터 “꾸물대지 말라”의 호통과 갑질이 시작됐다.
케이크 언니의 등장
일을 시작한 지 2주일이 지났다. 출근을 하니 누군가 작업대에 서있다. 그분은 2년 넘게 가게에서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안 보였던 이유는 잠시 한국방문을 위해서였다고. 그녀와 인사를 나누며 내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어김없이 사모님은 우리에게 수다 떨고 서있지 말고 할 일들 하라고 소리를 빽! 지른다.
케이크언니는 사모님께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귀 따갑게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한다. 내 옆을 지나가며 조용한 목소리로
“저 여자 원래 이상해요. 신경 쓰지 마요 “
그날 알았다. 사모님은 나에게만 소리치는게 아녔다. 나에게만 갑질을 하는게 아녔다. 사모님이 짜증 섞인 말 한마디를 내뱉으면 케이크 언니는 다 들리게, 일부러 다 들리게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중얼거림이 욕인지 알면서도 사모님은 모르는 척을 하는 것 같다. 사모님도 더 이상 응수하지 않았다.
오, 2년 넘는 경력직의 짬바가 이런 것인가..
어느 날은 사모님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지인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나는 어차피 물소리가 시끄럽게 나는 싱크대 앞의 붙박이니 안 들리는 척 하지만, 같은 작업대에서 케이크를 만드는 그녀는 코 앞에서 사모님이 말을 하는데도 들은 척을 안 한다. 또다시 나의 옆을 지나가며 속삭이듯 말한다.
"저 여자 말에 대꾸하지 말아요. 일만 커져요."
과연 그녀는 2년 넘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은 것일까..
젊은 시절, 부부가 아무것도 없이 뉴질랜드로 건너와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번듯한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빵집 사장, 사모님보다 나에게는 이 빵집의 암울한 분위기를 2년 넘게 겪고 있는 그녀가 더 대단해 보였다.
꽈배기를 튀기던 인상 좋은 언니
얼마 후 또 새로운 사람이 가게에 있었다. 빵집이 바빠져 꽈배기를 튀길 사람이 필요해 뽑았다는데 그녀는 인상이 좋고 친절했고 밝은 사람이었다. 내 아이들과 학년이 비슷한 남매를 둔 엄마랬다. 첫 출근을 한 그녀에게 사모님은 기름 솥 앞에서 꽈배기 튀기는 법을 가르쳐주며 한번 해보라더니 꽈배기 언니의 어설픈 행동을 보고 어김없이 화를 냈고 여러 번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3일째 출근날, 사모님은 꽈배기를 뒤집는 시간이 늦어져 뒷면이 조금 더 익었다고, 앞뒷면 색깔이 달라 기름 솥에 튀겨지고 있는 꽈배기들을 모두 팔 수 없다고 꽈배기 언니에게 책임지라고 씩씩대며 화를 냈다. 사모님 옆에서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서있었다.
설거지하는 나에게는 물에 미끄러져서 뼈가 부러지면 책임지라더니 꽈배기 언니에게는 빵 한쪽면 색이 진하게 나와서 팔수 없어졌으니 책임을 지란다.
꽈배기 언니는 결국 양손에 꽈배기 봉지를 들고 퇴근했다.
내 일을 하느라 바빠 그녀가 그 꽈배기를 책임지고 다 사간건지 어쩐 건지는 잘 모르겠다. 꽈배기의 기름이 번져가는 종이봉투를 양손에 들고 빵집의 문을 나서는 꽈배기 언니의 뒷모습만 잠깐 봤을 뿐이다.
난 그녀를 3일밖에 볼 수 없었다.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잘 가라, 내일 보자 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친절하고 밝은 그녀도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이상한 여자의 갑질로 갑작스러운 모멸감을 느껴 당황스럽고 슬프고 서러웠겠지.
몰래 연락처까지 교환한 단발머리 언니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나보다 세 시간 일찍 출근해 일하고 내가 출근하면 퇴근을 했다. 사모님은 새로운 사람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다. 그녀의 나이는 사모님보다 조금 어렸고 사모님은 그녀에게 다행히 소리는 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잠깐의 대화에도 기분 나쁜 뉘앙스와 비아냥은 여전하다.
난 늘 일찍 출근을 했기에 우리가 겹치는 시간에 살짝 이야기할 수 있는 틈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서서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면 어느새 나타나 빨리빨리 움직이란다. 그래서 우리는 팔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고 작은 소리로 왔다 갔다 하며 잠깐의 안부를 나눈다. 사실 우리의 대화는 5분도 안된다. 새로운 사람과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하는 게 10분이 걸리겠나, 20분이 걸리겠나. 잠깐의 시간에도 사모님은 늘 CCTV처럼 감시했고 그녀 덕에 아르바이트 생인 우리 둘은 주말이 지나면 비밀연애 중인 연인인 듯 애틋한 눈인사와 어깨를 토닥여주며 서로를 응원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일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오늘같이 쌀쌀한 날 걸어오는 것이 춥지 않았냐고 말하며 내 손을 잡는 단발머리 언니의 손바닥에서 종이를 스르륵 건네받았다. 단발머리 언니는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비밀 첩보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처럼 재빠르게 내 손으로 전달했고 나는 그날 일하는 내내 웃음이 났다.
퇴근해서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언덕길에서 곧장 단발머리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덕에 오늘은 힘들지 않게 일했다 고맙다 말했다. 단발머리 언니는 나이 든 자신에게도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내뱉는, 며칠 일 해보니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던데 젊은 사람에게는 오죽하겠나 싶어 꼭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나의 출퇴근 시간에 대하여 정확한 말도 해주었다. 단발머리 언니의 자녀들이 파트타임 잡을 했을 때, 사수가 그러더란다. 단 1분의 지체나 빠름도 없이 일하기로 한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게 서로를 위한 배려고 자신을 지키는 법이라고, 이 말이 맞다. 나는 바쁜 가게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늘 일찍 나갔고 늦게 퇴근했다. 35분이라는 오버타임에 대가는 수고보다는 모멸감이었다.
단발머리 언니는 아이들 다 대학 보내고 독립시키니 시간이 많아져 지역 내 여러 커뮤니티에서 자원봉사활동과 취미활동을 한단다. 요즘 아침잠이 너무 적어져 새벽시간의 짧은 일을 하기에 적당하다 싶었지만 며칠 해보니 사장내외의 인격에 하루하루 놀라고 있는 중이라고.
그녀는 오늘 새벽에 빵집 일을 끝내고, 함께 걷는 멤버들과 짧은 코스의 부쉬를 걷고, 지금은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샌드위치와 수프를 만들러 교회에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겪어보니 그녀는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남을 배려하는, 뉴질랜드 와서 처음 겪어본 어른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사람의 심리에 대해 파고든 적이 있었다. 몸과 마음, 경제적으로 외로운 이들을 돕는 일을 하려면 복합적인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 다른 학교의 계절학기까지 찾아 들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사회복지사 초년생일 때, 기초생활수급자 어르신께서 매주 지원받는 요구르트 주머니에 요구르트 1개가 덜 들어있다며 자신을 차별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며 달려들어 내 멱살을 쥐고 흔들 때도, 이 어르신은 얼마나 삶이 힘들고 고달프면 이럴까 싶었다.
매일 빵집을 나설 땐 큰 집기들을 설거지하느라 티셔츠 배부분이 축축해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아이들을 픽업하러 가는 20분을 땀이 나게 뛰고 걸으며 높은 언덕을 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사회초년생일 때가 떠올랐다. 각기 다른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사연에 안타까웠다. 그리고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늘 고민했다.
빵집의 사장사모님 부부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겠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들과 인연의 길이를 더 늘이고 싶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지도 않다. 물론 사모님이 자주 내뱉는 험담에 가담하기는 더 싫다.
나는 빵집에서 4시간 35분 내내 일하며 가져간 물병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도 못하고 일하는 상황이지만 내 마음과 정신을 지켜내고자 지금을 비관하거나 비참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단 내일, 10시 출근, 2시 퇴근을 하겠다 단단히 다짐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