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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h Aug 29. 2023

나를 가난하게 봤구나 사모님은

난 당신이 가여운데

10시 출근을 다짐했지만 앞치마를 입고 비닐봉지에 내 옷과 가방을 넣는 시간이 있으니 3분 일찍 출근한다.


사모님이 "요즘 출근이 늦네?"라고 말하면 나는 얼른 앞치마 앞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사모님께 보여준다.


9시 59분.


사모님은 눈을 흘기며 지나간다.


4시간의 일을 하러 나오기 위해서 나는 아침부터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먹여 학교로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집안을 정리한 후 후다닥 씻는다. 나에게는 파트타임도 엄연한 일이니 비비크림을 찍어 바르고 집 밖을 나서서 바삐 언덕을 내려간다. 해가 반짝일 땐 언덕을 내려가는 20분의 시간 동안 길가의 꽃과 풀들, 저 멀리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한 날이면 씻고, 깔끔하게 드라이를 했어도 폭풍을 만나 바다에 빠져 갓 건져진 인어공주의 왕자님처럼 쫄딱 젖어 엉망이 된다.


뉴질랜드의 겨울엔 비가 자주 온다. 비가 자주 오면 사람들이 밖을 잘 나오지 않으니 빵집의 매출도 덩달아 떨어진다. 그래서 만드는 빵의 개수도 줄이다 보니 내 일도 줄었다. 4시간의 일을 하며 최저시급을 받고 있지만 손님이 많이 줄어 이제는 토요일에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뻤다. 그동안 토요일에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아침에 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날씨 탓에 일이 줄어드니 근무시간이 4시간은 3시간이 되고 그러다 2시간까지 줄었다. 엎친데 덮쳐 아이들의 2주 방학까지 맞물렸다. 2시간 일을 하자고 방학인 아이들을 어디 맡길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물론 방학이 돼도 학교마다 홀리데이 프로그램과 YWCA, 지역 커뮤니티센터에 반나절 또는 오후 6시까지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당시에 내가 받고 있는 최저시급 17.70불로 4시간을 일해도 하루에 약 70불을 번다. 한화로 5만 6천 원. 거기에 당연히 세금도 뗀다. 아이 한 명 당 50불에서 70불 사이의 홀리데이 프로그램을 보내면 내가 하루에 5만 원 벌자고 8만 원을 쓰는 꼴이 된다. 더구나 지금은 손님이 줄어 2시간 가까이 일을 하고, 비가 오면 사모님은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고 가라는 말을 하기 일쑤다. 어떤 날은 1시간을 하고 가라고 한 적도 있다. 고작 1, 2시간 일을 하자고 아침부터 바쁘게 준비하고 나와 오늘은 몇 시간 일을 하게 될는지 눈치 보며 점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돈 벌러 나와 내 멘털까지도 탈탈 털리는 이 짓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매일 한 두 시간 일하자고 비까지 쫄딱 맞아가며 왕복 40분을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그만두겠다 말했다.


계약서 없이 일은 시작했어도 원래 일을 하기로 했던 4시간을 보장받지 않는 이상 방학의 애들 홀리데이 프로그램비 보다 적게 벌면, 나와서 일할 이유가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사장사모님의 갑질, 시도 때도 없는 짜증과 일하는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제 멋대로인 그들의 비인격적 태도를 견디고 일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그동안 없었고 모두 한 달도 안돼 그만두었다.


트레이닝도 다 시켜놨는데 갑자기 관두면 빵집도 곤란하다고 한다. 어차피 계약서도 없으니 예의상 노티스를 3일 주고 관두겠다 다시 말했다.


트레이닝? 그냥 일하는 내내 귀에 피가 나도록 쓸데없는 잔소리와 짜증을 듣고, 사장부부의 아주 사적인 부부싸움을 목격한다. 그게 다다. 빵의 기술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사치. 물론 배우려거든 학교를 가야 하지. 그래도, 적어도, 숨은 쉴 수 있게 해 줘야지. 계속 내려다보며 설거지를 하느라 목이 아파 고개를 들어 올리면 나에게 꾸물댄다, 느리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업장에 일을 하러 나온 나에게 1시간 만에 오라 가라 하면 안 됐다. 1시간만 일을 하고 왕복 40분을 걸어 집으로 간다.


나는 오늘도 17,70불(한화 14,000원)을 벌었다.







4시간 근무 보장 약속



빵집에서 당연히 지켜졌어야 할 근무조건에 대해서 사모님은 나의 불만사항을 접수했다며 나의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지금 당장 사람을 구할 수 없으니 자기 사정을 좀 봐달라 한다. 케이크만 전담으로 만드는 케이크 언니도 일이 줄어 주문이 있는 날만 케이크를 만들어놓고 간단다. 매출이 줄어 매일 4시간 사람 쓰는 것이  빵집엔 부담이 돼도 내가 일을 잘하니 시간보장 해주겠다, 다시 한번 자기 사정을 좀 봐달라 부탁한다.


빵집에 어디 고객센터가 있나? 불만사항을 접수했다니..

그래도 안하무인, 인격의 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모님이 개선의 여지를 보여주니 몇 개월 일을 더 해보자 싶었다.


전날 남편은 아이들 방학 동안 택배일을 2주 미룰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어차피 빵집에 그만두겠다고 말했으니 그럴 필요 없다 했지만 남편의 생각은 확고했다. 우리 그동안 뉴질랜드로 건너와 비자문제와 여러 시행착오들로 마음 편하게 쉬어본 적도 없으니 친구가 점점 많아지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방학에 실컷 놀 수 있는 홀리데이프로그램과 데이 트립을 보내주는 게 어떻겠냐고, 우린 그 시간 동안 잠깐의 휴식을 갖자고.


휴식의 꿈에 부풀어있었지만 어차피 아이들이 집에 없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자 싶었다. 물론 방학엔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지만 2주만 지나면 다시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그러다 보면 점차 메꾸지 싶었다.






손님이 줄어들고 할 일도 줄어든 빵집에서 뭐라도 해야지 싶어 빗자루를 들고 좌석이 있는 홀로 나가 청소를 했다. 어차피 덩치 큰 아들은 오늘도 계산대 뒤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만 들여다보느라 손님이 먹고 난 접시와 음료잔은 사모님이 치우지 않는 이상 몇 시간이고 그대로 있다. 테이블 밑의 빵가루와 달콤한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부지런히 몰려든 개미들은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계산대 옆 케이크 전시 케이스를 들여다보니 사이사이 시커먼 때와 죽어있는 날파리들이 많다. 이것 역시 사모님의 아들, 나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청년 눈에는 안보이겠지. 아니 알아도 못 본 척했겠지. 홀의 구석구석 닦고 또 닦는데도 깨끗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구멍 난 고무장갑을 끼고 왔다 갔다 청소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사모님이 청소를 잘하는 것 같으니 발효기를 닦아달라고 한다. 내 키보다 큰 빵 발효기 안으로 들어가 양쪽 선반 사이를 닦고 반대편 싱크대에서 큰 바가지에 물을 가득 받아 다시 반대편에 있는 발효기에 부어 아래 바닥도 닦으라 한다. 물론 바닥을 청소한 시커먼 구정물도 다시 바가지로 퍼내 반대편 싱크대로 왔다 갔다 하며 버려야 한다.


청소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아주 좁고 깜깜한 발효기 안으로 들어가 틈새를 정신없이 닦다 보니 전에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폐쇄공포증까지 느껴졌다. 쭈그리고, 몸을 반으로 접어 발효기 바닥의 구정물들을 퍼내느라 얼굴에 그 더러운 구정물도 튀고 신발도 젖었다.


퇴근하려 나오는데 사모님이 달력에 내 근무시간을 10시~2시로 적는다.


시계를 보니 2시 35분.


????


나는 10시부터 2시 35분까지 일을 했다.


사모님은 나를 5분 일찍 보내는 게 아까워 40분짜리의 일을 시킨다.  매번 20분을 오버타임해도 내 노동의 값을 공짜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에게 정확히 출퇴근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종이를 만들어 기재하고 오버타임이 며칠 쌓여 한 시간이 되면 그 시간만큼도 급여를 달라고 했다.


사모님의 대답은?


“참~나, 그렇게 다 따져 살면 이민사회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애들 홀리데이 fee도 못 낼 만큼 가난해서 못살겠다길래 4시간 채워준댔더니 바라는 것도 많네!!! 그럼 내일 35분 늦게 나와요! 그럼 됐지?”


그녀는 손님이 뚝 끊긴 빵집에서 4시간 내내 쓸고 닦는 내가 적잖이 미웠나 보다. 못된 말과 빽빽 질러대는 잔소리를 매일 들어 어지간한 말에는 이제 꿈적도 않게 된다.


돈이 필요하니 돈을 벌러 나간 거다. 가난하진 않다.

아니? 가난하면 어때.


마음이 가난한 그녀에게 웃으며 내일 보자 말했다.



내일은 정말 35분 늦게 나갈 참이다.




(이런게 이민사회라면 누가 올까요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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