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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h Aug 16. 2023

한국의 경단녀, 뉴질랜드에서 아르바이트하다

비자가 해결되니 다가오는 생활비 문제

이민을 원했던 남편의 철저한 계획에 2년을 넘게 시달리다 얼마나 좋길래 저러나 싶어 '한번 살아보자' 하는 마음을 안고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내가 해외살이를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뭐 해 먹고살지?'

'의사소통은 어떡해?'


뉴질랜드에서 수입 없이 퇴직금과 저축 잔고로 우리가 몇 년을 지낼 수 있는지, 만약 직업을 얻게 된다면 추가로 몇 년을 더 생활할 수 있는지 남편의 엑셀파일에는 수많은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뉴질랜드의 물가는 예상보다 높았고 간장 한 병, 설탕 한 봉지 등 작은 양념부터 큰 가구까지 모든 살림살이를 사야 했기에 중고로 마련한다 해도 목돈이 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하루 이틀 만에 받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로켓배송은 이곳에 없기에 일일이 발품을 팔아 살림과 먹거리를 매일같이 장만하며 채워야 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살림이 구비되고 비자도 찾게 되자 남편은 학업에 매진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뉴질랜드에서 수입이 없는 우리의 잔고는 남편의 계획이 무색하리만큼 바닥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이 추위를 그냥 견뎌야 해? 정말?”


히트펌프가 무엇인지도 몰라 집을 구할 때 난방시설이 하나도 없는 집을 렌트했다. 추워지는 날씨에 집에서는 수면잠옷을 내복처럼 입고 기모후디와 패딩을 껴입고 털양말을 신었다. 목도리도 둘렀다. 그래도 집안에서는 입김이 났다. 오히려 집 밖이 더 따뜻했다. 보일러 없는 뉴질랜드는 당연히 추운 거라 생각했고 잠을 잘 땐 뜨거운 물을 담은 고무주머니를 이불속에 넣고 추위를 견디려 애썼다. 난방비도 포함하지 않은 우리의 생활비에서 더 이상 지출을 줄일 부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학생비자인 남편은 적어도 6개월은 더 학교를 다녀야 하고 졸업하자마자 취업이 되리란 보장도 없으니 학교를 가지 않는 요일에는 제한적으로 택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동안 우리의 속을 썩였던 비자문제가 해결되면서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워크비자를 받았고 비워져 가는 생활비 통장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도록 나도 벌어야 했다. 교민사이트를 뒤적이다 집 가까운 곳의 빵집에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어 다음날 면접을 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오후간식으로 먹일 머핀을 만들며 베이킹에 재미를 붙였고 베이커리에 관심이 생겨 나중에 빵집을 차려도 좋겠다는 생각에 찾은 파트타임 자리다. 내가 가진 기술은 없으니 가게에서 시키는 일 착실히 하며 제빵기술도 배우면 좋겠다 싶었다.




13년 만의 면접



과거 사회복지사로서 대민업무를 하며 다져진 친절함과 밝은 인상, 평소의 톤보다 조금은 높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를 내며 면접시간에 맞춰 베이커리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은 고소한 빵냄새로 가득 차있다. 누구 하나 반갑게 맞이하는 이는 없었고 나는 카운터를 기웃거리며 사장님을 찾았다. 면접을 보러 왔다는 내 말을 듣고 조금 기다리라더니 다시 가게 뒤의 작업장으로 들어가 20분 넘게 기척이 없었다. 그동안 한국인 손님이 몇 분 들어와 빵을 사가는 것을 보니 주 소비고객은 한국교민인 듯했다. 잠깐 계산대 앞으로 나와 손님의 빵을 계산하고 다시 작업장으로 들어간 사장님은 나를 그냥 세워둔 채 본인 일에 바빴다. 계속 기다리다 아이들 하교시간이 되어 사장님을 다시 찾으니 면접인지, 호구조사인지 모르게 나의 개인사를 묻는다.


호구조사 같은 짧은 면접이 끝나고 내일부터 나오라는 연락을 그날 저녁 문자로 받았다.


내일 열 시까지 오세요. 늦지 마세요.




오랜 시간 걱정해 왔던 해외살이를 위한 두 가지 고민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떨려서 잠이 오지 않는, 뉴질랜드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첫 출근을 앞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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