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등불 앞에는 만리심이라.
[청와 론]
1. 두 만리심
최치원은 당나라 종사관 시절 지은 시문을 귀국 후 편찬하여 <계원필경>이라는 시문집을 발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추야우중>이라는 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치원이 이 시를 당나라에서 썼다는 주장과 귀국 후에 썼다는 주장이 학계에 대립되어 있습니다.
'만리심'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양립하는 주장에 대해 각각 두 판본의 한시를 지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2. 타방만리심(他邦萬里心)
아래의 졸시(拙詩)를 써서, 장인어른께서 서예전에 최치원(崔致遠)의 <추야우중>을 출품하시어 입상하신 것을 감축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고운(孤雲)'은 최치원의 호이고, '하곡(霞谷)'은 장인 어른의 호입니다.
執筆 其一 집필 기일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孤雲生遠邦 고운생원방 秋風吟客窓 추풍음객창 墨香發霞谷 묵향발하곡 擧話以自省 거화이자성
붓을 잡으매 1
외로운 구름이 먼 나라에서 피어나서, 가을 바람에 객창감을 읊조리니, 먹 내음이 노을 비낀 계곡에서 피어나, 자기성찰로 화두를 삼으시네.
이 시에서는, 고운이 만리 타국에서 느끼고 있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하곡 선생님이 만년(晩年)에도 붓을 잡으시며 '자기성찰'을 화두처럼 놓지 않으시는 삶의 자세를 대비해 보려고 했습니다.
이 때의 만리심은 한 마디로 '객창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 밖에는 쓸쓸한 바람이 불고 추적추적 비만 내리고, 외로이 등불 앞에서 시를 지어 읊조리는 모습이 처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객창감이 되었든, 쓸쓸하게 스러져가는 처연한 삶이 되었든, 그 고(孤, 외로움)와 고(苦, 괴로움)를 한 자루 붓으로 꿋꿋하게 견뎌내시는 장인 어르신을 뵈면서, 옷깃을 여기며 저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3. 피세만리심(避世萬里心)
앞의 이야기도 그럴 듯합니다만, 결과적으로 고운이 당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 후에도 제 뜻을 펴지 못하고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읊조리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입니다.
執筆 其二 집필 기이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孤雲浮萬里 고운부만리 北窓一枝影 북창일지영 墨香發霞谷 묵향발하곡 擧話以自省 거화이자성
붓을 잡으매 2
외로운 구름이 먼 곳으로 떠가고, 나뭇가지 하나 북창에 그림자 지네. 먹 내음이 노을 비낀 계곡에서 피어나, 자기성찰로 화두를 삼으시네.
이 시에서는 제 뜻을 펴지도 못하면서 세상 만 리 밖으로 떠도는 '고독함'과 만년의 '자기성찰'을 대비해 보았습니다.
이때의 만리심은 한 마디로 '避世萬里心'(피세만리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불화(不和)할 때 그 세상과 맞서거나 사세가 여의치 않으면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펼치지 못한 뜻, 일지(一枝, 一志)가 있어 그것이 거역(拒逆)의 모습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을 '北窓一枝影'으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4. 또 다른 만리심
김소월의 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가 떠오릅니다. 저 말 속에서 정말 '세상'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알아야 할 게 뭐든 그건 한참을 모르는 생각이 아닐른지요? 정말 모르고 산 건 '자기 자신'이 아닐른지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만 리가 아니라, 세상을 뚫어져라 보는 것으로부터, 자기 내면을 돌이켜 보는 것까지, 그 돌이켜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만리심'이 아니겠는지요? 자기성찰이, 평생을 두고 가야 할 '만리심'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