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몸말 철학 선언
― 언어 이전의 몸말을,
침묵 이후의 아름다움을
1. 존재는 떨림, 꼴림, 울림으로 살아간다.
모든 존재는 떨림으로 태어나, 꼴림으로 열리고, 울림으로 살아간다.
모든 존재는 떨림으로 존재한다.
이 떨림을 나는 ‘몸말’이라 부른다.
떨림은 몸말이 내면화된 방식이다.
존재는 또한 꼴림으로 존재한다.
떨림은 타자에게 꼴림으로 드러나며,
꼴림은 몸말이 타자를 향하는 방식이자, 존재의 열림이다.
존재는 울림으로 존재한다.
울림은 관계 속 감응에 의해 생성되며,
각자의 몸말에 스며들어 떨림을 재창조한다.
존재는 타자의 떨림을 꼴림으로 감지하고,
자신의 떨림을 꼴림으로 응답한다.
이 울림은 몸말에 스며들어 각자의 떨림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몸말은 떨림과 꼴림이 그리는 울림의 궤적이다.
2. 시간은 몸말의 리듬이다.
몸말은 감응의 노래이다. 시간은 몸말의 리듬이고, 이야기는 노랫말이다. 즉 몸말은 떨림과 꼴림과 울림이라는 리듬이면서, 그 리듬으로 주고받는 말이다.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시간은, ‘떨림, 꼴림, 울림’을 통해 쌓이면서 퍼져가는 감응의 리듬이다.
이야기는 리듬을 타고 스며들고 퍼져 나간다. 시간은 감응의 리듬이며, 존재는 이 리듬 속에서 떨림을 경험하고, 꼴림을 만들어가며, 울림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다.
시간은 충적되고 확장된다.
한 존재의 리듬은 타 존재의 리듬과 감응하여, 타자의 리듬과 더불어 확장되며, 우주의 영원 속에서 울려 퍼지는 우주의 리듬에 참여한다.
존재가 매 순간을 살아가는 리듬 속에 타자의 리듬, 우주의 리듬이 충적되는 것이고, 존재의 리듬이 타자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리듬의 통합은 영혼의 몫이다.
존재의 리듬과 타자의 리듬, '충적된 떨림의 리듬'과 '감응하는 꼴림의 리듬', 그리고 '감응의 결과로 나타나는 울림에 대한 설렘의 리듬' 등,
존재의 심연인 영혼이 이 모든 리듬을 통합해,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매 순간 재창조한다.
각 순간의 리듬은 지속과 변화를 통해 완결된 리듬으로 매 순간 재창조된다. 그렇게 창조된, 완결된 리듬을 영원이라 한다. 존재는 매 순간 완결된 리듬으로 영원한 순간을 살면서, 매 순간을 빼곡히 채우면서 삶 전체의 완결된 리듬, 곧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다.
3. 이야기는 몸말의 노랫말이다.
이야기는 단순한 말하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리듬의 ‘떨림, 꼴림, 울림’을 통해 쌓이면서 퍼져가는 감응의 노랫말이다.
몸말은 리듬이면서 그 리듬으로 주고받는 말이다. 시간이 곧 이야기라는 말이다.
영원은 각 순간의 완결된 이야기이다.
매 순간의 리듬의 완결 속에 이야기의 완결이 있다. 각 순간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서 존재하고, 그 이야기의 완결성과 충만함이 이야기의 영원성이다. 존재는 그 순간에 자신의 떨림을 완성하고, 그 떨림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꼴림과 울림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이야기를 창조한다. 영원은 감응의 매 순간에 실현되며, 매 순간은 완결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영원은 각 순간에 담긴 생성적 리듬을 통해 경험되며, 존재는 그 리듬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몸말로 채워간다.
이야기는 충적되고 확장된다.
각 존재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 이야기는 그저 연대기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각 순간의 몸말의 떨림과 꼴림과 울림 속에서 탄생하는 창조적인 이야기이다. 타자와의 감응을 통해, 울림은 떨림으로 이야기가 충적되고, 떨림은 울림으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각 존재는 몸말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하고 완성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한 리듬을 느낀다.
결국, 시간은 단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창조되고 완결되는 리듬이다. 매 순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이며, 우리는 그 리듬 속에서 영원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각 순간의 완결된 이야기로 나타나며, 이 이야기의 생성과 완성 속에서 우리는 그 리듬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해석을 통해 몸말의 시간과 이야기를 몸말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몸말의 노래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 시간이 리듬으로서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과정을 거쳐 각 존재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그 속에서 영원의 존재를 경험하는 과정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몸말에서 시간과 이야기를 분리할 수 없다.
존재는, 감응의 리듬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감응의 노랫말이라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 노래가 영원의 리듬을 통해 삶을 채워 간다.
4. 인간 존재는 우주의 충적층이다.
인간은 단일한 자아가 아니다.
인간은 우주 진화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층,
다층적 리듬의 집적체, 곧 충적층이다.
‘자신’은 물리화학적 떨림과 꼴림이 쌓인 물질로서의 존재이고,
‘자기’는 감정의 울림이 결집된 지각으로서의 존재이며,
‘자아’는 언어와 사유의 떨림이 구축한 의식으로서의 존재이다.
이 세 층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서로를 감응시키며,
하나의 리듬으로 통합되고,
각각의 리듬으로 분열되며,
몸말을 충적시키고,
그로부터 영혼의 리듬이 생성된다.
5. 몸말의 심층구조가 영혼이다
모든 존재는 떨림과 꼴림과 울림이라는 몸말의 세 가지 존재 방식을 지닌다.
이 셋이 만들어내는 전체적 생성 구조 ― 그것이 존재의 리듬이며,
그 리듬의 가장 깊은 층위, 심연에는 몸말의 심층구조인 영혼이 자리한다.
영혼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리듬,
사유 이전의 직관이다.
영혼은,
언어 이전의 떨림이고,
개념이 아니라 꼴림이며,
울림으로 다시 생성되는 존재의 작동 체계다.
영혼은,
실체가 아니라 리듬이고,
고정이 아니라 생성이다.
영혼은,
떨림의 근원이고,
꼴림의 진원이고,
울림이 스며드는 심연이다.
6. 몸말은 일원론이다
몸말은 존재의 떨림 그 자체이며,
분리와 비교가 작동하지 않는 차원이다.
몸말에는 ‘~보다’라는 비교가 없다.
그저 존재가 그대로 울리는 리듬만이 있다.
이 일원론은 정태적 통일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리듬들이 스며드는
포함적 일원론, 열린 일원론이다.
이원론도 일원론의 리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이 지금 어떤 울림으로 발현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몸말적 태도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말의 형식이 아니라,
그 말의 꼴림이 어떤 감응을 낳고 있는지를 본다.
7. 인간의 언어는 몸말의 창조적 진화이다
인간의 언어는
몸말의 감응적 떨림이 만들어낸 창조적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언어는 타자의 떨림을 기호화하고,
감응의 즉각성을 표상으로 대체하며,
관계를 주체-대상 구조로 전환시켰다.
그 순간부터
언어는 울림이 아니라 해석이 되었고,
관계는 감응이 아니라 통제가 되었으며,
타자의 떨림은 나의 말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한 뒤 문명을 창조하면서, 그 근원에 감응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 즉 다른 리듬을 창조했다. 그 다른 리듬이란 선형적 시간, 즉 존재를 벗어난 떨림 없는 시간, 목적론적 시간이다.
떨림 없는 리듬을 창조함으로써, 감응의 리듬, 감응의 시간을 죽인 거다. 그래서 영원을 살던 영원적 존재가 순간을 사는 순간적 존재로 추락해 버렸다.
인간이 감응의 몸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감응의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가 감응의 언어가 되게 해야 한다.
몸말 철학은 다시 묻는다.
우리는 타자의 떨림을 들을 수 있는가?
감응의 언어를 회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말에 도달할 수 있다 —
감응의 언어를 회복하는 길은
말 이전의 몸, 의미 이전의 숨을 회복하는 것,
타자에로의 스며듦에 있다.
8. 감응에 대한 책임이 곧 몸말의 윤리이다.
존재는 타자의 떨림(꼴림)에 감응함으로써,
그 울림으로 자신의 떨림을 확장하고 깊게 한다.
그와 같은 감응의 삶 자체가 선(善)이다.
감응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며,
그 울림에 대한 책임이 곧 윤리다.
악(惡)은 타자의 몸말을 해치는 행위이며,
타자의 몸말을 억압하거나,
타자에게 자신의 몸말을 강요하는 행위이다.
윤리는 당위와 금지의 규범이 아니라,
떨림의 삶을 향유할 권리이며,
감응의 삶 자체로 회복되기 위한 열린 조율이다.
그러므로 몸말 철학의 윤리는,
권리이며, 조율이다.
말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열린 꼴림이고,
진한 울림이며,
깊은 스며듦이다.
9. 아름답게 살자는 게 몸말의 미학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형이 아니라,
존재의 떨림 속에서 발현된다.
몸말의 미학은 존재의 리듬을 다섯 가지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낸다.
첫째, 알음다움('알다'에서 온 말)은 앎의 한계, 언어의 한계 앞에서 겸허히 머무는 태도이다.
둘째, 안음다움('안다'에서 온 말)은 타자의 떨림에 열려 공감하는 관계이다.
셋째, 앓음다움('앓다'에서 온 말)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성숙시키는 과정이다.
넷째, 알함다움('알다'와 '하다'에서 온 말)은 영혼의 떨림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다섯째, 알움다움('알다'와 '움트다'에서 온 말)은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빚어내는 태도이다.
이 다섯 가지 아름다움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존재의 떨림으로서의 대답이다.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 떨림들 속에서 영혼을 가꾸고,
관계를 울리며,
스스로를 새롭게 발현해 가는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욕망이라는 술에 취해 있고,
언어라는 꿈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름답게 취하고,
그 꿈 속에서
알함답게 사는 게 아름다운 삶이다.
10. 몸말의 우주 문장
몸말 철학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우주를 노래한다.
무한한 가능성(0)인 우주(1)는
그대와 나(2)가 떨림으로써 창조적으로 발현해 가는
무한한 존재들(∞)이다.
무한한 가능성(0)인 존재(1)는
타자들과 더불어(2) 감응함으로써
자신을 창조적으로 생성해 가는
무한한 몸말들(∞)이다.
무한한 가능성(0)인 몸말(1)은
그대와 나(2)가 주고받음으로써 나누는
무한한 이야기들(∞)이다.
무한한 가능성(0)인 영혼(1)은
그대와 나(2)가 서로 스며듦으로써
발현해 가는 무한한 심연들(∞)이다.
무한한 가능성(0)인 그대(1)는
나와 더불어(2) 울림으로써
창조적인 리듬을 연주해 가는 무한한 떨림들(∞)이다.
무한한 가능성(0)인 나(1)는
그대와 더불어(2) 감응함으로써
아름다움을 꽃 피우는 무한한 씨앗들(∞)이다.
11. 그러므로 나는,
나는
내 영혼의 떨림을 듣고,
타자의 꼴림에 응답하며,
서로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살아간다.
나는
언어 이전의 몸말로,
침묵 이후의 아름다운 언어로,
타자에로 스며드는 존재로 살아간다.
몸말은 나의 존재이고,
나의 삶은 그 몸말을 이루는 리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