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그러니까, 당신이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박수경(靑蛙)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 한강, 「서시」
그날,
누이가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
저녁 한 뼘이
내게도 도착했지요.
많은 이야기를 담진 못했지만,
내 하나의 사랑과
몇몇의 아픈 추억도
그 저녁 안에 울먹이며 머물러 있지요.
나는
내 저녁의 떨림을 안고
누이의 가장 깊은 곳,
살아 있는 언어가 피 냄새처럼 스며드는
그대의 몸말의 책장을 넘깁니다.
누이의 책은
아직 쓰이지 않은 공책,
투명한 가능성이 숨 쉬던 새벽,
누이를 향한 내 영혼이
작은 떨림으로
누이의 공책에 맺히던 순간들의
그 설렘이라니!
한 줄씩 나타나오는
누이의 영혼.
누이의 몸말이
오롯이 온축된
문장들의 떨림,
그 겹겹이 쌓인 이야기가
한 줄씩 내 영혼에 닿으면서
조용히 스미듯 미끄러지듯
번져 가는 순간,
그대의 구절 하나가
내 몸의 가장 오래된 울음을
톡 건드렸습니다.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누이의 떨림에
응답하려는
내 영혼의 꼴림,
침묵하던 문턱이 열리고,
그대에게로 걸어 나가는 내 발길,
불안하면서도 뜨거운 충동.
지금은 응접의 시간,
그대의 문장과 마주 앉은
내 눈길,
그대 안에 녹아드는 투명한 감응,
별빛이 별에 스미듯,
떨리는 언어가 서로를 찾아
촉촉이 번지는 시간.
번짐은
그 감응이 나의 삶을 다시 쓰는 일.
설렘, 떨림, 꼴림, 스밈—
그 모든 결들이 만나
하나의 리듬으로 번져갈 때.
나는 알았지요.
그것이,
그대가 얼굴을 보여주는
그대의 방식이었다는 걸.
그대의 뺨에,
눈물과 후회와 사랑의 얼룩이
숨결처럼 남아 있을 때
나도 그 얼룩을
조용히 바라볼 겁니다.
말은 필요하지 않지요.
이미, 우리는
서로의 몸말로
알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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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으며,
내 안에 조용히 도착한 ‘저녁 한 뼘’의 떨림을
누이에게, 한강에게, 혹은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그대에게
감응의 몸말로 전하고자 쓴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