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벽에 들은 노래, 존재의 떨림, 침묵의 윤리

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by 청와


몸말로 읽는 한강의 시 - 존재의 떨림, 침묵의 윤리

한강의 시는 침묵의 몸이 들려주는 진동이다. 그녀의 시에서는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감각이 먼저 온다. 그 감각은 내 몸을 스치고, 다시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번에 읽은 「새벽에 들은 노래」는 ‘말’이 되지 않은 어떤 말, 다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몸의 울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를 몸말철학의 관점에서 다시 느껴보고자 한다.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1)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2)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3)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4)

다시는

이제 다시는/5)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2-13쪽)
/번호는 제가 임의로 넣었습니다.

[닫힌 틈으로 열리는 몸말]

1. 입술, 몸의 문을 닫다

봄빛은 삶입니다. 어둠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말들이 <틈으로> 번지고 스며듭니다. 관계들 사이로, 관계를 넘어 서로의 몸말과 영혼(넋)에까지. <반쯤 죽은 넋>들의 삶을 보면서, 화자는 <입술>을 다뭅니다.

나는 입술을 다문다 / ... / 나는 입술을 다문다

시인은 두 번 침묵합니다. 입술을 닫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부정이 아닙니다. 말의 부정이 아니라, 말 이전의 반응으로서의 침묵입니다. 몸이 감지한 충격, 감당할 수 없는 진동 앞에서 몸이 입을 닫는 겁니다.

혀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혀는 언어의 기관이면서도, 동시에 영혼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말의 부재는 몸이 아직 말할 수 없는 상태인 겁니다. 몸의 자기보호이고, 어쩌면 영혼의 공황, 혹은 실어증 이전의 경계에 놓인 몸의 상태입니다.

아직 감당할 수 없는 떨림으로, 몸은 입을 닫습니다.

2. 금기어와 첫 떨림

시의 첫 장면에서 ‘얼비친 넋’은 어떤 생경한 감각의 반영입니다. 나 또한 어릴 적, 어느 날 문득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금기어였습니다. 팔딱거리는 말, 사전에 꼭꼭 숨겨 두고 일상에서는 써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은 말.

이 충격은 언어에 대한 내 몸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금기어는 그냥 말이 아니라 감각의 폭발이었습니다. 금기를 통해 나는 생명을, 성(性)을, 존재의 낯섦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이나 쉽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 또한 입술을 다물었던 겁니다.

금기어는 살아있었고, 일상어는 반쯤 죽어있었습니다. 언어 또한 몸말입니다. 태어나서 이리저리 의미와 형태의 변화를 겪다가 죽기도 합니다. 몸말이란 존재의 떨림입니다. 금기어라는 언어 존재는 오히려 그 떨림을 간직하고 있기에 생명의 리듬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겁니다. 반쯤 죽은 일상의 말들은, '살인', '강간', '살육' 이런 말들조차도 떨림을 잃어버렸습니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3. 청와에서 몸말로

그러다 대학에 와서, 말의 울렁증은 말에 대한 집착으로 변해갔습니다. 나는 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언어를 편집하고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철학, '청와'(靑蛙)의 출발이었다. 청와에서 출발한 철학이 지금은 '몸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봄’은 ‘보이니’ 봄이다. ‘사람’은 '살+암' 즉 모든 생명이다. ‘넋’은 무생물의 생명의지다. ‘얼’은 생물의 생명의지다, ‘영혼’은 인간의 생명의지다. '자신'은 '나의 물리-화학적 인 몸'이다. '자기는 '나의 감정-의지적인 몸'이다. '자아'는 '나의 개념-의식적인 몸'이다. '밥'은 몸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이다. '똥'은 몸에서 나가는 모든 정보이다. 등등.

내게 인간 언어는 울렁증의 대상에서, 지배하고 싶은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인간 언어 이전의 느낌이자, 말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존재의 떨림인 '몸말'을 말합니다.
인간 언어는 그 몸말을 번역할 수 없지만, 그 떨림을 담아내려는 시도만이 진실한 말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4. 틈 ― 스며드는 몸말의 문

한강의 시는 ‘틈’에 대해 말한다.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틈은 존재 사이, 사물 사이, 너와 나 사이에 있습니다. 그 틈은 멀어짐이 아니라, 관계의 가능성입니다. 몸은 틈 속에서 반응하고, 언어는 틈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언어는 완성된 구조가 아니라, 틈으로부터의 솟음입니다.

모든 말은 틈에서 나오고, 틈으로 스밉니다. 행간(行間)도 함께 느껴 보라고 합니다. 그 말이 침묵하는 행간이 틈이고 말은 그 행간에서도 나옵니다.

그 틈이 닫히고, 다시 열릴 때 우리는 말합니다. 그런데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닙니다. 인간 언어의 부재, 말의 침묵은 오히려 존재가 몸말을 하게 합니다. 인간 언어는 그 몸말의 직역도, 의역도, 번역도 아닙니다. 몸말이 인간 언어로 스미고 번져야 하는 겁니다. 그 때 언어도 떨림을 간직하게 되고 몸말이 되는 겁니다.

<혀가 녹으면> 굳어 버린 인간 언어에 숨이 돌고 떨림이 있는 말로 서로에게 '다시' 스며들게 됩니다.

5. '이제 다시는'에서 '이제 다시'로

<다시는 이제 다시는>

이 반복은 부정인가요, 아니면 희망인가요? 시인은 여기서 기묘하게 ‘는’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제 다시”와 “이제 그만”의 경계를 묘하게 융합합니다. 그것은 ‘닦음’(修)의 철학입니다. '이제 그만'이라는 말은 부정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라는 말은 긍정입니다. 지금 매 순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다시'라고 하는 겁니다.

닦음은 완성이 아니다. 영원한 시작이며, 다시 걷는 길이다.
닦음은 목적이 아니라, 방향이고 태도입니다.
멈추지 않기 위한 멈춤이고, 되기 위한 아직-아님입니다.

이 시는 인간의 언어를 몸말로 다시 말하기 위한 침묵, 다시 걷기 위한 무릎 꿇음입니다. 한강은 이 짧은 행간 속에, 삶의 윤리와 영혼의 자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6. 몸말 ― 언어 너머의 떨림

인간의 언어는 그물입니다. 하지만 그 그물은 결코 사물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물에는 틈이 있고, 그 틈이 바로 몸말의 문입니다.

한강의 시는 말하지 않으려 하면서, '몸말합니다'. 그 몸말은 몸으로 와 닿으면서 스며들고 번져가는 겁니다. ‘말만 말이 아니라, 스미고 번지는 모든 것이 다 말’입니다. 몸말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감응이고 울림입니다. 한강의 시는 그 몸말로 씌어진 시입니다.

나는 그 진동을 감지하며, 여전히 인간 언어의 그물코를 기워가고 있습니다.

몸말은 단지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진실이며, 언어 너머의 가능성입니다.
한강의 시는 그 몸말의 틈 속에서 솟아나고,
스미고, 번져 우리에게 닿습니다.

몸이 먼저 듣고, 몸이 먼저 말하는 말.
나는 그 떨림에 귀 기울이며, 오늘도
말을 줄이고, 침묵을 새기고,
조심스럽게 인간 언어의 그물코를 기워갑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진실한 말은 언제나 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