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마크 로스코와 나
- 2월의 죽음
한강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년, 16-18쪽.)
[몸말로 읽기]
1. 관계가 없다니?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거짓말입니다. 한강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말은 어떤 정보를 기호로 나타냅니다. 외부 정보를 기호로 인식하는 것도 말입니다. 외부 정보를 인식하는 과정에 말에 의한 조작이 일어납니다. 인식한 정보를 기호로 전달하는 것도 말입니다. 자기의 인식을 기호를 통해 외부로 나타낼 때도 말에 의한 조작이 일어납니다. 인식과 표현 모두에서 말을 통한 조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지어내는 말’과 ‘속에 간직한 말’의 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겉으로 지어내는 말’을 ‘겉짓말(거짓말)’이라 하고, ‘속에 간직한 말’을 ‘속엣말(참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일단 1) ‘거짓말과 참말은 최대한 같다’, 2) ‘거짓말과 참말은 최대한 다르다’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한강의 말은, ‘겉으로 지어내는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논리에 의해 ‘거짓말’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가 다 ‘거짓말이야’라고 하는 겁니다.
다음, 한강의 말은, 1)인지 2)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한강의 겉짓말이 속엣말과 같다면, 한강은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가 아니라, 지금에라도 ‘마크 로스코’와 ‘한강’이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한강이 굳이 그렇게 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제가 반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한강의 겉짓말이 속엣말과 다르다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야 합니다. 한강이 그와 같은 겉짓말을 함으로써 어떤 것을 노렸는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뱉게 되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전자라면, 어떤 의도가 있는 말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말일 수 있습니다. 후자라면, 제가 생각하는 세상 이치와 다른 이치를 속엣말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2. 생명이라는 그물
생명(모든 존재)은 그물로 존재합니다. 그물은 그물코와 그물코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물코는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인해 생성됩니다. 즉 그물코라는 생명은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그 관계를 사이(間)라고 합니다.
그 생명의 관계를 동아시아에서는 공간, 시간, 인간이라는 삼간(三間)으로 인식했습니다. 공간이란 그 그물코와 그물코의 관계, 빈 틈과 빈 틈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물의 코와 줄은 양(陽)이고, 구멍과 틈이 음(陰)입니다. 시간이란 그물코들의 양태가 지속하는 가운데 변화하고, 변화하는 가운데 지속하는 생성을 말합니다. 그 생성은 잠시도 쉼도 없고 끊임도 없는 낳음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이란 시간(음)과 공간(양)을 떠나 있는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시공으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의 관계로 생성하는 존재가 곧 생명(인간, 모든 존재, 우주, 氣)입니다. 인간이란 시공간적 사물의 생성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인류는 시공간적 사물의 한 양태일 뿐입니다. 우주라는 그물망의 하나의 그물코일 따름입니다.
3. 관계의 그늘, 그늘 너머의 관계
그물코와 실낱이 생명이 살고 있는 공간이라면, 구멍과 빈 틈이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공간입니다.
‘죽음과 생명 사이. /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 버티고 /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벌어진 틈 같은 2월'은 탄생 직전의 고통, 즉 몸말의 진통입니다. 로스코의 죽음이 생명의 자리를 비우고, 그 빈 틈 속으로 한강의 생명이 들어섭니다. 이것은 '비극적 전이'가 아니라, 존재의 순환이며 충적입니다.
생명이라는 그물코는 스스로 다른 생명들의 그물코로 흩어져 들어갑니다. 그 생명의 자리는 빈 틈으로 아물어갑니다. 빈 틈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자궁의 어둠입니다. 관계는 여기서 고통으로, 혹은 창조의 산통으로 변모합니다. 그렇게 그물코와 실낱, 빈 틈과 구멍은 고통과 산통을 버티고 아물며 끊임없이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것을 생생불식(生生不息)이라고 합니다.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생생불식이란, 모든 생명은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관계를 창조적으로 발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관계란, 보이지 않는 숨은 관계, 실낱같은 한 오라기의 인연, ‘운명’처럼 느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여건, 선택이라 말하는 창조적 의지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이루어가는 모든 것입니다.
한강이 그와 같은 이치를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한강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숨은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강은 자신의 삶 속에 드리워져 있는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늘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관계들을 봅니다. ‘죽음’입니다. 피의 냄새입니다. 그것이 ‘관계의 그늘’입니다.
한강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 말은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에게 이어지는 슬픈 인연, 아픈 인연들이 바로 자기-자신을 이루어온 삶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겁니다.
한강과 로스코의 관계의 어둠, 죽음의 피비린 흔적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관계의 그늘’ 너머,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버텨 마침내 아물게 되면, 한강에게 드리워져 있는 ‘관계의 그늘’로부터 ‘빛’이 나오리라 봅니다. 그 빛은 눈부신 빛, 광명이 아닙니다. 어슴프레 비치는 ‘밝은 그늘’이라 부를 수 있는 깊은 빛, ‘밀양(密陽)’일 겁니다. 그것이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발현해 가고 있는 한강에게 바라는 저의 소망입니다.
4. 한강과의 '몸말의 대화'
한강은 언제나 침묵 가까이에서 말합니다. 그 침묵은 공허함이 아니라, '몸말'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물코의 빈 틈과 같습니다. 한강의 시는 침묵의 사유이고, 저는 그 침묵을 해체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도 조용히 저의 '몸말'로 응답합니다. 저를 울린 한강의 몸말을 제 안에서 길어올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