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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괜찮아>로부터 정중식의 <나는 반딧불>까지

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by 청와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강,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75-77쪽.)


[몸말로 읽기]


1. 갓난아이의 방언


갓 태어나는 아이는 세상에 대고 첫울음을 웁니다. ‘응애~’ 그것이 목소리로 처음 내는 말입니다. ‘눈 부셔~’라고 했는지 그 의미는 알 길 없습니다. 아이가 뱃속에서는 발길질도 했고, 방귀도 뀌고 그랬답니다. 아이가 온몸으로 하는 짓들이 모두 아이의 몸말입니다. 자기-자신의 느낌과 몸 상태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아이의 몸말은 점차 표정과 <거시기>로 집중됩니다. 거시기는 ‘울음’과 ‘웃음’입니다. 아이가 하루 종일 웃음을 말하면 ‘괜찮다고’ 알아듣고, 울음을 말하면 ‘좋잖다고’ 알아들으면 되는 겁니다. 아이는 호불호(好不好) 또는 편불편(便不便)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아이의 몸말, 아이의 방언(方言)입니다.


아이의 울음, 아이의 방언을 청해할 능력이 없으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라고 아이의 울음, 아이의 방언을 공연한 소리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고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으로 아이에게 어른의 언어, 어른의 방언을 들이댑니다.


‘너 지금 왜 우는 거야?’ ‘와이 아 유 크라잉 나우?’ ‘니 시엔짜이 웨이썬머 쿠?’


아이가 엄마의 언어를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__∈⊱’ 번역하면 ‘나는 지금 기분이 좋잖다고 하는 건데, 엄마도 기분이 좋찮은가 보네, 계속 좋잖아 버리자.’


‘응애~ 응애~’


2. 엄마의 몸말


‘이제 괜찮아’는 아이가 알아들은 말이 아닙니다. 아이가 알아들은 말은 엄마의 방언, ‘이제 괜찮아’가 아니라, 엄마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입니다. 이제 괜찮아진 것은 엄마의 느낌이 괜찮아진 겁니다. 편안해진 엄마, 괜찮아진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그 느낌을 아이가 알아들은 겁니다.


엄마의 '괜찮아'라는 말로 인해, 아이의 불편함, 좋잖음이 해소되거나 해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엄마의 느낌이 아이에게 전해짐으로써 아이의 불편함, 좋잖음이 괜찮아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이에게 이제 이렇게 해보자고요. ‘왜 그래?’라는 말을 하면서 불안하고 불편하고 걱정해하는 느낌이 아니라, ‘괜찮아’의 편안하고 안락한 느낌과 억양으로 말해 보는 겁니다. 예전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었습니다. 외국 사람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싫어해’라고 가르쳐주었다는 겁니다. 그 외국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싫어합니다’라고 고백했다던가요?


말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지만, 더 원초적인 것은 ‘느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3. 방언끼리의 소통을 위하여


모든 언어는 ‘방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특정한 시대와 사회,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을 통과한, 한시적이고 지역적인 약속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은 보편이 아닌 개별적 울림, 곧 ‘방언’입니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방언으로 삽니다.

우리는 세상의 언어를 빌리되, 자신의 떨림으로 그 언어를 다시 씁니다.


우주는 거대한 몸이고, 그 안의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몸말, 자기만의 방언으로 살아갑니다.

별처럼 반짝이는 각자의 방언, 각자의 떨림을 들으며,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라는 거대한 몸의 일부로서의 나를 조용히,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주를, 서로를 더 풍요로운 리듬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방언이 아름다운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그래도 괜찮아 나는 ‘개똥벌레’니까


아이가 자랐습니다. 자기가 ‘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개똥벌레’였다는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개똥벌레였기에 망정이지, 개똥벌레가 아닌 쇠똥구리나 말똥구리였다면 어땠을까요? 어떻게 해야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괜찮지 않은 이유, ‘왜 그래?’를 다시 불러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에게 느낌이 좋지 않은 이유, 괜찮지 않은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 아이가 자라서도 지금 살아가면서 좋지 않은 이유, 괜찮지 않은 이유들이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편한 ‘왜 그래?’가 아니라, 성숙한 ‘왜 그래?’가 있어야 합니다.


차분한 관찰, 섬세한 성찰,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별이 빛난다고 하는 것에 높은 점수를 매겨주고, 미물이라고 하는 쇠똥구리에게는 아무 점수도 주지 않는 인식의 이원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겁니다. 반짝이는 별이나 쇠똥구리는, 우주가 생겨났다면,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 함께 있었던 물질들이 변화되어온 우주적 존재들입니다. 반짝이는 별이나 발길에 차이는 쇠똥구리나 모두 같은 우주적 존재라는 통찰이 필요한 겁니다.


‘한참 동안 찾았던 내 손톱 / 하늘로 올라가 초승달 돼 버렸지 /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너무 멀리 갔죠 / 누가 저기 걸어놨어 누가 저기 걸어놨어 // 우주에서 우주로 날아온 /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 /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다시 태어났지’


‘돼 버렸지’라는 통찰이 놀라운 겁니다. 사물에 대한 고정된 자성(自性)에 대해, 사물은 있는 것처럼 지속되지만, 없는 것처럼 변화되는 연관된 전체의 인연(因緣)이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되고, 되고, 되어 가는 과정을 우주의 ‘활동운화(活動運化)’라고 합니다. 지금 지속되고 있는 눈부시지 않은 내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눈부심’을 찾아내는 성찰이 필요하고, 빛을 발하는 창조적 발현이 이루어지는 삶이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적 발현’입니다.


4. 같으면서 다른 별의 길


무한한 가능성(0)인 모든 각각의 존재(1)는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2) 감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가는 무한한 몸말들(∞)이다.


이것은 몸말 철학의 기본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같으면서 다릅니다. 같아지려고 해봐야 같아질 수도 없습니다. 같아지고 싶으면 그 존재의 영혼이 자기 영혼에 스며들도록 하는 겁니다. 달라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존재와 더불어 감응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곧 그 길입니다.


별들은 누가 더 빛을 밝게 내는지 다투고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보낼 수 있는 떨림의 빛을 그저 묵묵히 발하며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괜찮지 않은 건, 아이들이 보며 걸어갈 앞선 이들의 발자국들입니다.

갈 곳도 모르고 방향도 잃은 채 비틀거리는 눈밭에 뱉어놓은 자기 발의 말을 들어보자고요.

욕망덩어리, 관념덩어리의 배설물들...


무거운 머리를 들고, 뒤집기를 하고, 무릎으로 기다 일어서서,

어느 날,

중력을 이기고 첫 발걸음을 떼는 아이를 보자고요.

모두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빛나는 스타들입니다.


그 속에,

얼마나 오랜 우주의 떨림이 다시 반복되면서,

자기만의 것으로 창조되면서,

우주와 더불어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는

몸말이 들리시나요?


5. 시로써 맺습니다.


星夜 성야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諸物自初生運化 제물자초생운화

其中白眉星之誕 기중백미성지탄

因展才夢於天下 인전재몽어천하

汝我都是地上星 여아도시지상성

幼星飛來女息懷 유성비래여식회

如母懷汝母之母 여모회여모지모

化母産星夢而天 화모산성몽이천

汝我都是閃忽星 여아도시섬홀성


별이 빛나는 밤


너나 나나 모든 물질은 태초의 우주로부터 변화하면서 생성되어 온 우주적 존재이다.

우주적 존재들의 가장 아름다운 생성은 온 우주에 빛을 펼치는 별의 탄생이다.

자기 내면의 에너지와 꿈을 자기 세계에 펼치기에

너나 나나 모두 다 땅 위에서 빛나는 별들이다.

먼 하늘로부터 30광년을 어린 별빛이 쉬지 않고 날아와 이제 큰딸아이에게 안겼다.

엄마별이 그랬듯이, 엄마의 엄마별이 또한 그랬듯이,

엄마가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별과 또 하나의 꿈과 또 하나의 우주를 잉태해 낳는 것이다.

너나 나나 모두 다 불꽃처럼 살다가는 반짝이는 별이다.


별만 별이 아니고 너나 나나 모두 다 이 땅 위에서 빛나는 별입니다. 솔이별, 한이별, 수진이별, 수경이별, 한결이별, 소담이별, 준화별...


우리는 모두 반짝이는 별입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이 반짝입니다. 보석 같은 결실의 빛이 반짝이는 겁니다. 우리는 이들을 스타라고 부릅니다.

꿈을 간직한 사람들이 반짝입니다. 희망의 빛이 반짝이는 겁니다.

울고 웃는 사람들이 반짝입니다. 간절한 눈물과 환한 미소가 반짝이는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반짝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빛이 반짝이는 겁니다.


수 만 광년을 쉬지 않고 달려와 제 눈에 들어온 밤하늘의 별빛과 제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나이는 같습니다. 별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나 제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모두 아득한 옛날로부터 모이고 흩어지면서 변화해온 한 형제들입니다.


밤하늘의 별은 물론이고,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반짝이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반짝이는, 다시 만나는 것이 기뻐서 반짝이는 형제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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