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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바스에 대한 예술적 험담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바스》

by 디디온 Mar 26. 2025

국립오케스트라 소속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투덜거림으로 가득 찬 《콘트라바스》는 재미있다. 재미있는 소설이다. 8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기에 한번 들고 읽으면 놓을 수가 없다. 지적이지만 무겁지 않고, 불만에 가득 차 있지만 위트가 넘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맞아,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하고 수긍하게 만든다. 이토록 재미있고 수다스럽고 예술적인 불평이라니.       


오케스트라 현악기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낮은 음역을 책임지는 콘트라바스는 우리가 ‘콘트라베이스’로 알고 있는 악기이다. 독일어로 콘트라바스(Kontrabass), 영어로는 더블베이스(double bass)라고 부르는 이 악기는, bass가 영어로 ‘베이스’ 발음되는 바람에 혼동이 생겨 오랫동안 ‘콘트라베이스’라고 불렸다. 그러나 ‘콘트라베이스’는 독일어(‘콘트라’)+영어(‘베이스’)가 혼합된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짬뽕 같은 단어이다.   

   

소설 도입은 콘트라바스 연주로 먹고사는 사람답게 “오케스트라에 지휘자는 없어도 되지만 콘트라바스는 없으면 안 된다”며 콘트라바스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친다. 오케스트라를 떠받치는 기본 골격 같은 것이라며 구구절절 콘트라바스를 떠받들던 화자는 곧이어 험담에 돌입한다. 몸체 길이 1.12미터, 꼭대기 스크롤까지 1.92미터나 되는 주체 못 하는 짐 같은 콘트라바스는 어깨는 곱사등이처럼 축 늘어지고 히프는 축 처지고, 허리는 한마디로 참사인 뚱뚱한 노파 같고, 지금까지 발명된 악기 중에서 가장 못생기고 둔하고 기품 없는 악기라면서.     


음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자기 말에 동조하게 만드는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입담은 투덜거림 속에서 반짝거리는 위트가 융단처럼 깔려 있는 지적 향연을 펼쳐 보인다. 악기 톤이 끔찍하여, 요한 슈페르거, 도메니코 드라고네티, 보체시니, 지만들, 쿠세비츠키, 호틀, 반할, 오토 가이어, 호프마이스터, 오트마르 클로제 같은 콘트라바스 대가가 악기에 대한 절망감에서 작곡으로 넘어갔다는 둥 하며.     


그런가 하면 음악에 대한 애정도 내보인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도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인 포로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음악은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며 정치와 시대 흐름을 뛰어넘어 무언가 인간 보편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인간 영혼과 정신에 타고날 때부터 내재된 본질적인 요소가 음악 속에 들어 있고, 음악은 순수 물리적 실존의 배후에,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에 있으며 시간과 역사, 정치, 빈부, 생과 죽음을 넘어서는데 그런 면에서 음악은 영원하다면서.     


매우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화자는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콘트라바스를 매개로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함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데, 수다 같은 유머 속에 은근하면서 예리한 비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서글픈 삶에 대한 초상도 숨어 있다.     


 “음악은 이성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저 높은 곳에 있다. 세상만물을 지배하는 힘이,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이 음악에서 나온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며 저자는 그저 허리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라고 적었는데, 대단한 입담과 위트가 빛을 발하는 투덜거림에 방금 소설을 내려놓은 독자는 ‘그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다. “희곡이자 문학작품으로 우리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콘트라바스》에 대한 찬사에 이의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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