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폼폼 Jun 17. 2024

[지난 이야기] 음악, 기억하십니까

음악과 함께 이어지는 삶

*2023년에 쓴 글입니다. 


음악은 시기를 상징한다. 유치원에서 동요 ‘병원차와 소방차’를 익혔다. 많은 노래를 배웠을 텐데 지금 기억나는 건 그것뿐이다. “하얀 자동차가 삐뽀삐뽀~ 내가 먼저 가야 해요 삐뽀삐뽀~ 아픈 사람 탔으니까 삐뽀삐뽀~” 지금도 어린이 인기 동요 베스트 100에 드는 명곡이다. 이 때는 음악으로 사회시스템과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동시에 배우던 시기였다. 초등학생 때는 학교 어린이 합창단에 소속되어 이른 아침마다 가곡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교양있게 시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보라~아! 고향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하지만 동시에 동요와 만화주제가를 개사 버전으로 부르며 뛰어다니던 유치한 시기였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 염소 여럿이 화투 치며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음악은 나를 위로했다. 용돈 한 푼이 아쉬웠던 고등학교 시절, 도망치는 심경으로 음반 가게에 들어섰다. 저물어 가는 카세트테이프의 시대. 시디플레이어가 없던 나는 뉴에이지 테이프들을 모아놓은 작은 코너 앞에 섰다. 뉴에이지, 새 시대. 얼마나 멋진 말인가. 거기서 전혀 모르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거금을 주고 샀다. S.E.N.S.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지하철 문가에 서서 일몰하는 한강의 쓸쓸한 풍경을 지나쳤다. 나 자신이 스크린 속의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반복적으로 쥐어 짜내는 일상에서 음악이 잠시 나를 끄집어 내어 영화 속에 넣어주는 순간이었다.

S.E.N.S. : Sound, Earth, Nature, Spirit의 약자


음악은 향수를 자극한다. 20년 전쯤에 매일매일 접속하던 온라인 게임이 있었다. 그 게임은 아름다운 OST로 회자되며 훗날 오케스트라 연주곡도 만들어지고 매진공연도 성사시켰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곡은 NPC의 대사로 팬이 만들었던 패러디 곡이었다. 수리비가 싼 대신 성공확률이 100%가 아니었던 NPC는 자주 맡긴 무기를 망가트렸다. 그래놓고 아주 뻔뻔하게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라고 말해 무기와 함께 이용자들의 분통도 터뜨렸다. 다른 좋은 추억들도 많지만, 플레이 초기에 만났던 그 NPC가 가장 웃기고 유쾌하고 화딱지 나서 잊히지 않았다. 그 노래를 잊을만하면 흥얼거리며 실실 웃다가, 작년에 그리운 마음으로 게임에 다시 접속했다. 제작사의 문제로 곧 다시 그만두게 되지만.

NPC: Non-Player Character,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 대부분의 NPC는 한 자리 또는, 한 지역에 머물면서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도우미 역할을 한다.


음악은 함께한 이를 추억하게 한다. 첫 직장을 다닐 때 퇴근 후 동료 K와 걷고 있었다. 거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아이유의 ‘금요일에 만나요’가 흘러나왔다. “우~ 금요일에 시간 어때요, 주말까지 기다리긴 힘들어. 시간아, 달려라.” K는 입술을 작게 움직여 말했다. “꼭 내 마음 같아.” K는 훗날 결혼하게 될 사람과 막 연애를 시작한 참이었다. 다가오는 금요일에 들뜬 마음을 애써 누르다 무심코 흘렸을 그 말이 참 순수하고 수줍었다. 상투적이라 생각했던 가사가 특별하게 진심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금요일에 만나요'를 들을 때마다 자주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가수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을지 궁금해했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음악은 무엇일까. 언제나 빽빽한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손가락으로 훑어 넘겨 한 곡을 짚어낸다. ANRI의 ‘SHYNESS BOY’. 요리조리 꼬인 퇴근길을 달리다가도 이 노래가 흐르면 여름날 해 질 녘의 해안도로를 달려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도중 같았다. 그냥 환상 속의 해안가를 계속, 계-속 달려가고 싶었다. 일본 거품경제 특유의 여유로움과 낭만을 찰랑이게 담은, 오래된 시티팝을 들으며 현재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다 작년 생일, 남편에게 말해 그 곡이 담긴 ANRI의 ‘TIMELY!!’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물 건너온 시디를 부적처럼 소중히 책장에 꽂았다. 노래들은 또, 생을 이어가는 가는 줄이 되어주었다.


이전 13화 남고와 공학을 오가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