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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n 03. 2024

요구하지 않는 아이

이제 내 것이 생겨서 좋아

*세상에 저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 집 안에서만의 일입니다.


옛날 옛날 윈도우의 바탕화면 같은 하늘이다. 빽빽한 아파트 위로 새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하얗고 풍성한 구름이 뭉텅뭉텅 떠 있다. 그 선명함에 걸맞게 햇볕이 따가워서 대낮의 산책 시간을 줄여야 했다. 그저께 밤에는 비바람이 세차고 다음 날인 어제는 긴 셔츠의 옷깃을 여며야 했는데 신기한 일이다. 작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는 순식간에 모든 것이 변해버리는 듯했는데 이번 봄은 변덕을 부리며 요란하게 여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뚤어진 마당을 품은 작고 좁은 주택, 복잡한 골목 안 쪽 빌라를 떠나, 아파트 단지의 산책로를 걸을 수 있게 된 건 내가 인생을 산 지 35년 만의 일이었다.


한 주 동안 집에 큰 파란이 일었었다. 건강을 이유로 동생이 주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온 가족이 크게 다퉜다. 장거리 출퇴근과 마음고생으로 피골이 상접해진 동생은 몇 달 전에 직장을 그만뒀다. 동생은 연고가 크게 없는 지금의 도시에서 나의 가까이로 오기를 희망했다. 엄마, 아빠는 서울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했지만, 동생은 두 분의 어린아이 취급을 못 견뎌낼 게 뻔했다. 작년 여행에서 형편없는 체력으로 패러세일링 중 공중에서 토하던 동생을 본 나는 동생의 이사를 극구 환영했다. (그때 동생이 내 앞에 타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동생을 자주 들여다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꼭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생은 전셋값이 너무 비싸다고 했지만 멀어질수록 방문 횟수는 줄어들 것이고 꾸준히 밥을 먹여 토실토실하게 그를 살찌운다는 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게 뻔했다. 돈을 구할 방법을 골몰했다. 사비라도 털고 대출이라도 받아야 하나 고심했다. 엄마도 우리가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와중에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쉽게 다투는 두 사람의 사이의 전서구 역할로 바쁘게 오갔다. 다행히 단지 내의 좋은 집을 찾고 엄마, 아빠가 힘들고 급하게 땅겨온 적지 않은 돈으로 모든 불화가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음날 그 집은 매매되었다. 모든 노력과 말씨름이 허사로 돌아갔다.


나는 이제 우리 단지에 하나 남은, 조금 더 큰 집을 권했다. 동생은 큰 집은 관리가 어렵다며 도보 1시간, 차로 10분 거리로 더 먼 아파트를 골랐다. 도보와 차는 집을 나서는 부담감, 필요한 의지부터가 다르다. 밥 먹이기 힘드니 그러면 안 된다는 내 반복된 설득에 동생은 자신에게 강요치 말라고, 언제 그렇게 밥 챙겨달라고 했냐며, 자신의 결정 능력과 행동력을 의심치 말라고 언성을 높여 쏘아댔다. 그런 동생 앞에서 침묵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에는 아침부터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아빠가 동생을 만나러 가서 원하는 모든 걸 들어줄 마음인 것 같으니 아빠를 설득해 달라고 애걸했다. 동생이 고른 아파트로 덜컥 계약해 줄 생각인가 본데 충동적으로 그래선 안 된다고, 언니인 네가 있는 아파트로 꼭 들어가야 한다고. 마지막 힘으로 아빠를 만났다. 애가 아프니 일단 뭐든 해주자는 아빠의 말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떨어져 지낼 때 동생이 혼자 밥을 잘 챙겨 먹을까도 걱정됐고, 내가 거기까지 갈 힘도 없었다. 모두 자기 의견만 들이미는 실랑이에 지쳤다. 같은 단지에 살아도 동생을 챙기는 게 내 생각보다도 벅차겠구나 싶었고,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동시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끌고 가는 동생도 어느새 미워졌다. 


구질구질한 옛날 일들이 생각났다. 시작은 3,000원짜리 샤프였다. 손에 쥐면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아이들이 딱 신기해할 만한 그런 샤프. 그걸 가진 아이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9살 무렵, 아빠에게 이틀간 끈질기게 사달라고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빠는 내가 떼쓰는 버릇을 가질까 싹을 자르고 싶었던 것 같지만 나는 깊게 절망했다. 그 후로 나는 공부할 때 필요한 것 외에는 무언가를 거의 요구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지만) 집에서는 의식주와 독서만이 가능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값나가는 장난감, 워크맨, 비디오 재생기, 소파, 우리만의 가족여행과 외식, 자동차 같은 건 없었다. 햄버거, 카페, 극장을 친구들에게 배웠다. 동네학원만으로 명문대에 들어가서 흑백 휴대전화가 부끄러워졌다. 나를 위해서, 내 돈도 아닌 부모님의 돈을 받아 공부해 온 걸 아는데 뭔가 억울했다. 아빠와 엄마는 늘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고 피곤했다. 가난한 젊은 부부가 상경해서 집을 마련하고 아이 둘을 키워내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이 있었겠나.


아빠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생각난 옛일들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왜 동생에게처럼 예쁜 원피스 한 벌 안 사줬어." "너 때는 형편이 더 어려워서 그랬어." "아빠, OO이가 예쁜 원피스 입고 있을 때 내가 뭘 입고 있었는지 그때 사진 좀 봐봐." 나는 그때 내가 못생겨서 옷 입히는 재미가 없어 엄마가 옷을 안 사주는 걸까 생각했다. 엄마는 내 옷을 사러 갔어도 동생이 난리를 피우면 내가 양보해서 동생의 옷을 사서 돌아오곤 했다고 말했다. 어린 동생이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 받은, 나에게는 한 번도 없던 소꿉놀이 세트와 미미의 집이 부러웠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 동생이 며칠간 휴대폰을 바꿔 달라고 떼를 썼고, 그것이 이루어졌다. 요구와 수용이 서로 맞물려 이루어졌다. 또 아빠는 말했다. "OO이는 자기가 필요한 건 돈을 모아서 샀어." 내 아르바이트비는 엄마의 건강검진비와 나의 영어학원비로 갔다. 엄마는 주중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고 그래서 나는 엄마가 틀림없이 아픈 곳이 있을 거라고, 일찍 죽을 것 같아서 겁이 났었었다. 거기에 여러 차례 받아온 장학금은 집에 별 도움이 안 됐나 보다. 잊힌 걸 보니.


눈물에 그나마 있던 힘도 흘러나가고 머리만 아팠다. 동생의 거취에 대해 시작한 이야긴데 이제 더 이상 그것만을 두고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 동생은 엄마·아빠의 지원으로 자기가 고른 아파트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여전히 화가 난다. 무엇에 화가 나는 걸까. 거실 햇볕을 받으며 쪼그리고 앉아 못생긴 내 발가락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내가 너무 편향적으로 보고 있나, 나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과대망상하고 있지 않나. 일이 흘러가면 갈수록 점점 내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나는데 내 행동의 옳고 그름이 중요할까. 옳고 그름을 더 생각하다간 내 머리도 가슴도 터질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선 요구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그 요구를 수용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나는 동생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요구했고, 동생은 이를 강요라 여기며 거부했다. 그렇다면 거절을 인정하고 나의 요구를 거두어들여야 한다. 파란 와중에 동생과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사건에 너무 다른 가치관과 시각, 입장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네 근처에 살게 할 테니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엄마·아빠의 요구를 거절하고 동생과의 대화방을 나왔다. 나의 행복을 위함이었다. 다들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랑 아빠는 가진 돈을 두 분의 행복한 노후만을 위해 넉넉히 쓰셨으면 좋겠고, 동생은 새로운 동네에 잘 정착했으면 좋겠다. 나는 자유롭게, 동생이 이 도시로 이사 와도 돕지 않기로 정했다. 나 하나 못 챙기면서 남을 도울 생각을 했다니 어리석다. 더불어 여태껏 요구할 줄 몰랐던 과거의 나도 바보. 


남편은 기념일마다 나에게 물었다. 뭐가 갖고 싶냐고. 대부분은 갖고 싶은 게 없었다. 돈으로 달라고 해서 그냥 차곡차곡 통장에 넣어뒀다. 물건들에 다소 아쉬운 점이나 약간의 고장이 있어 불편해도 손을 좀 더 움직이고 견딜 수 없을 때만 새것을 사자는 게 내 지론이었다. 우울증이 심해진 후에는 더욱 무욕한 상태가 되어 약 때문에 살은 찌고 머리와 옷은 남루해졌다. 그런 내게 남편은 회사에서 복지 포인트가 나올 때마다 최신 휴대전화기와 아이패드를, 고가의 드라이어를 차근차근 사줬다. 막상 써보니 참 좋더라. 거기에 남편은 기회가 있으면 기왕이면 다 해보자는 주의였다. 옆에서 부추겨주는 사람이 있으니 여행 가서 먹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볼 수 있었다. 신기했고, 용기가 났다. 물론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가계부와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튼 좋더라. 


갖고 싶은 물건도, 하고 싶은 일들도 나에게 좀 더 요구해 보면 나의 답답함이 좀 더 사라질까?


남편이 이 난리가 일어났으니 이제 가족 모임은 없어지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NO.”라 답했다. 분명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게 뻔했다. 나보다 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가족들에게 다 줘버리는 엄마에게 마음이 기울어져서. 아빠와 대화를 마무리지으며 나는 아빠에게 엄마에게 금일봉을 줄 것을, 앞으로 아빠가 설거지를 할 것을 요구하고 그러겠노라 약속받았다. 꼭 지켜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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