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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May 27. 2024

나를 비추는 찬란한 빚

동생은 피아노를 100번 쳤다. 나는 7번 치고 가게를 뛰쳐 나갔다

돈도 써본 적이 있어야 쓰는 재미를 안다. 지금이나 대학에 다닐 때나 나는 늘 누워있었다. 그러다 가끔, 막연히 ‘돈이 있으면 그래도 좋겠지.’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 일식집 서빙, 수학 과외 등등. 처음으로 받은 아르바이트비로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고 싶었던 12권짜리 판타지 소설 세트를 샀다. 그러고나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부모님께 건강검진을 받으시라고 그 돈을 드렸다. 내가 아는 바, 두 분은 제대로 된 건강검진을 받으신 적이 없었다. 마지막 아르바이트비는 토플학원비로 썼다. 공부를 이유라 하면 당연히 부모님이 주셨겠지만 부담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면 그 돈들을 어디다 어떻게 쓸까, 문득 생각해 본다.

 

2010년은 나의 소비 폭발기였다. 3수 끝에 교사가 되어 긴 고통과 가난의 나날로부터 탈출했다. 대학생 때까지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있고 다리 뻗을 곳이 있어 돈의 귀함을 몰랐다는 걸 수험기간에 알게 되었다. 합격할 때까지 참 많이 돈에 굶주렸고 자존심도 상했고 자격지심이 하늘을 꿰뚫었다. 역사적인 3월 17일. 세상에, 내 통장에 돈이, 돈이 들어왔다! 부모님께 선언했다. 1년간 저축을 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겠노라고. 그리고 시작되었다. 나의 덕질이. 첫 번째 부임지에서 서울 부모님댁까지는 대중교통으로 3시간 거리였다. 주말마다 꼬박꼬박 서울로 향했으나 효를 행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공짜로 숙박하며 부지런히 연극과 뮤지컬을 보러 다녔다. 마침 같은 덕질을 하는 친구가 있어 덕심은 더 활활 타올랐다. 만날수록 더 큰 소비를 부르는 우정이었다. 우리는 매번 밥값과 공연 관람비를 나누어 계산하기도 귀찮아져서 데이트 통장(?)까지 만들었다. 많으면 한 달에 10회까지 공연을 보았다. 아침으로 식빵, 저녁으로 양상추와 요거트를 먹었지만 내가 번 돈을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쓰는 행복감을 느꼈다.


1년 후, 월급이 반 토막이 되었다. 부모님께 등록금 빚을 꼬박꼬박 부쳐야 했다. 쓸 수 있는 돈은 줄고 학교는 나의 열정과 체력을 앗아갔다. 학교가 강제로 맡긴 보충수업을 하며 여기저기 앓으며 근근이 살았다. 그래도 공연 관람을 완전히 포기하진 못했다. 찔끔찔끔 보면서 식빵, 양상추, 요거트로 연명했다. 몸이 원해 고기가 당기는 기분도 알게 됐다. 훗날의 체력을 생각하면 밥은 제대로 먹었어야 했는데. 얼마 안 되는 돈인데도 관리할 줄을 몰랐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게 돈은 어영부영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 무렵 내 교사 친구는 “내가 미쳤었다”라 선언하며 지갑 속에서 모든 카드를 꺼내 가위로 잘라버리고 있었다. 돈 쓰는 건 어렵다. 꼭 필요한 쓰임처도 정하기 힘들고, 자제도 어렵다. 다행히 본능이 나를 살려 월급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보충수업비가 뒤늦게 들어와 메꾸는 식으로 크게 모으지도 많이 새지도 않게 살 수 있었다.


전 남자친구, 현 남편이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말했다. “OO아, 돈은 있니? 결혼은 돈이 아~~~주 많이 들어.” 그와 그의 통장은 해맑았다. 우리가 모은 돈, 양가 부모님이 지원해 주신 돈을 예산으로 황량한 동네들을 헤집었다. 내부를 다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은 어둡고 어수선한 집들만 잔뜩 봤다. 집이란 게 이렇게 비싸구나.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신혼집이 왜 그렇게 비좁았는지, 그럼에도 친구들의 표정이 밝았던 이유가 이해됐다. 은행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 대출이라 하면 진정한 어른의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사랑과 행복과 빚이 빛나는는 삶이 시작되었다. 훗날 또 다른 친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집 때문에 대출 계약서에 남편과 사인을 하면서 우리가 결혼식 때보다 더 강하게 얽히는 걸 느꼈어.”라고.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일본 주부가 쓴 절약 에세이를 읽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평범한 주부가 일상 속 절약 아이디어를 꾸준히 실천해 남편의 적은 월급으로도 남보다 일찍 집을 마련한 이야기였다. 돌이켜보면 절대 평범한 주부가 아니다. 그런데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해보자!" 외쳤지만 결심은 쉽고 실천은 어려웠다. 나의 이성은 궁상맞을 정도의 검소한 생활을 원하는데 나의 나약한 육체와 자제력은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자꾸 배달음식을 주문했고, 남편이 뭔가를 사자고 하면 “안돼!”를 외치다 슬쩍 “돼.”로 넘어갔다. 가까운 곳도 차를 타고 싶었다. 자차가 생기니 점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생활을 바짝 조이면 마트에서 당장 필요없는 생필품을 왕창 사버렸다. 홈쇼핑에서 가끔씩 100년 동안 쓸 수 있을 만한 양의 생필품을 충동구매하던 엄마에게 공감이 갔다. 돈을 쓰고 싶으니 그걸로라도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이럴 때를 위해 다이소가 있나보다.


가계부를 쓴 시간은 결혼생활 기간과 같아 8년이 됐다. 상대적으로 돈 관리에 소질이 없는 남편은 어련히 내가 잘하고 있겠거니 생각하지만 정말! 난! 그냥! 기록만 했다! 절약 효과 제로! 미안하다! 남편! 그 사이 집이 생기긴 했다. 그러나 우리 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 집은 S 은행님의 것이다. 우리 몫은 방 한 칸 정도... 덕분에 빚은 더 크고 환하게 빛난다. 요즘 시대에 대출 없는 집이 어딨냐지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보는 나다. 대출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서류에 사인을 시키는 은행원에게 조심스레 물었었다. "못, 못 갚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린 시절 드라마에서 본 빨간색 가압 딱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은행원이 별 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을 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겠나. S 은행님이 자기 집을 다시 찾아가겠지.


비장하게 독백해 본다. 나와 남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돈을 모으고 쓰는 것일까. 소고기를 먹으려고? 집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려고? 노후를 준비하려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려고? 인생을 즐기려고? 꿈을 실현하려고? 현재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나의 휴직으로 인해 비어버린 몫이지만 분명 장기적 목표와 거기까지 가기 위한 단계적 노력이 필요하다. 뒤늦게 지난달부터 가계부를 쓰며 카테고리별로 단기 목표와 예산을 싹 정립했다. 절약과 저축은 목표와 근성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걸 알았다는 게 뒤늦은 성장이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 동생과 롤플레잉 게임을 했다. 당연하지만 강한 무기는 게임 속 화폐로 무지 비쌌다. 그런데 스토리 중간에 들르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면 팁을 받을 수 있었다. 피아노를 치면 꽤나 길게 일정한 시간 동안 음악이 흐르고 1골드가 나왔다. 나는 7번 만에 지루함을 참을 수 없어 포기하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놀랍게도, 동생은 그 짓(?)을 100번을 해서 무기를 샀다(게임 제작자도 그런 집착을 생각 못하고 피아노 이벤트를 넣었을텐데). 최근에 그녀는 돈이 걸린 내기에 이기려고 모 리듬게임을 400번 넘게 시도해 실패 없이 완주하기도 했다. 독하다. 독해. 고개를 흔들면서도 생각했다. 그 정도 근성이 있어야 머리 위에서 찬란히 나를 비추는 빚을 꺼뜨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우선은 빚 갚기보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더 생각하며 돈을 쓸 수 있는 지점까지를 목표로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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