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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 씨의 패션 철학

by MJ

숙이 씨는 목티를 좋아한다. 목이 턱 끝까지 올라오되, 너무 조이지 않는 면 소재의 티셔츠를 선호하는데, 그걸 색깔별로 사놓고는 겨울 내내 입는다. 그러더니 요즘에는 나날이 상체 살이 붙는다며 조금이라도 슬림해 보여야 한다고 검정색 목티만 주구장창 입는다. 볼 때마다 검정색을 입고 있길래 단벌신사냐고 물어봤더니 똑같은 게 여러 장이라고. 숙이 씨에게 다른 옷도 좀 입으라고 한 마디 하면 추워서 '어쩔~수 없이' 입는 거지 겨울만 지나면 안 입는다고 항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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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면 짐작할 수 있듯이 숙이 씨의 패션 철학은 오로지 '기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전에는 더 화사하고 예쁜 옷도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 엄마의 옷장에는 무채색뿐이다. 검정색 패딩 조끼, 회색 후리스, 곤색 밴딩 바지..


내 기억 속 엄마는 허벅지 통이 좁은 나팔 청바지에 몸에 꼭 맞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곤 했다. 초등학생 딸이 있어도 아가씨 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는(나는 기억나는 바 없음) 숙이 씨. 처녀 적에는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다니는 멋쟁이였다고. 매일 하이힐만 신고 다녔던 엄마의 신발장에는 지금은 운동화 밖에 없다. 허리가 꼭 맞는 옷만 입던 숙이 씨는 이제 고무줄이 없는 바지는 못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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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하지 않고는 집 밖에 안 나갔다는, 반년에 한 번씩 볼륨 매직하러 미용실을 다녔다는 숙이 씨. 지금은 맨 얼굴에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파마기 없는 머리는 하나로 질끈 높이 묶고 다녀 딸내미들에게 전봉준이냐는 핀잔을 듣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내 기억 속의 엄마는 가지런히 빗은 머리를 예쁘게 올려 묶고 고운 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데 지금 숙이 씨는 엉클어진 머리에 대고 우리가 잔소리를 퍼부어야 겨우 머리를 빗는 시늉을 한다.


어느샌가부터 엄마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돈을 써야 할 곳들이 더 많아졌던 것 같다. 딸내미들 학원비, 남편 병원비.. 들어가는 돈은 점점 더 늘어나고 신경 쓸 일은 더 많아졌겠지. 주방에서도 집안에서도 어찌 그리 바쁜지. 모두 함께 외출을 갈 때면 숙이 씨가 가장 늦게 씻고 가장 먼저 단장을 마친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생강차나 견과류 따위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으니 헐레벌떡 집을 나설 때 모습은 자연인이 따로 없다. 잔소리를 하면 너희나 예쁘게 꾸미고 다녀라, 엄마는 이제 늙었다고 대꾸한다.


分享一组老奶奶穿搭,一点都没有所谓“老年人”的暮气 - 北美华人网 - huaren.jpg


그렇다고 숙이 씨의 패션에 대한 관심이 식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싼 옷이라도 새 옷을 사면 좋아하고 지나가다 예쁜 옷이 있으면 눈을 떼지 못한다. 옷을 쉽게 사지는 않지만 어쩌다 마음에 꼭 드는 옷을 샀을 때는 집에 돌아와 30분 동안 입었다 벗었다 하며 패션쇼를 한다(춤도 춘다!).


딸내미들에게 젊을 때 입고 싶은 옷 마음껏 입고 다니라는 숙이 씨. 자기는 처녀 적에 옷만큼은 원 없이 입어서 이제는 옷 욕심이 없다는 숙이 씨. 패션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챙기는 것이기에 그래도 나는 숙이 씨가 좀 더 예쁜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단장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조금은 더 가지면 좋겠다.


얼마 전 청바지를 하나 사줬더니 룰루랄라 기뻐하던 숙이 씨가 떠올라 글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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