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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 씨의 기록_파혼 이야기

by MJ

딸이 파혼을 당했다. 한밤 중에 전화가 걸려와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길래 나도 덩달아 허둥지둥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다 되었다. 한 시간 반 거리에 살고 있는 남자의 집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대체 이 밤중에 그곳까지 어떻게 간 것인지, 어쩌다가 무슨 일로 가게 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딸의 결혼식이 3달 뒤였다.


드레스와 예식장, 신혼여행 예약과 상견례까지 모두 끝난 터였다. 요즘 결혼이야 자식들끼리 알아서 다한다고 한다지만 뭐 더 도와줄 것이 없나, 하고 물어봐도 알아서 준비 잘하겠다는 답만 들었던 터였다.


상견례 때 남자 쪽 부모를 한 번 보고, 남자는 첫인사와 상견례 겨우 두 번 봤던 차에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내 마음을 '결혼을 앞둔 너는 더 심란하겠지' 하고 다스리고 있던 차였다.


대체 무슨 일로, 세상 연인들이 다정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내 딸은 오밤중 택시비를 삼십만 원이나 써가며 고속도로를 헤매고 다녔는지.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결혼을 앞둔 딸의 마음은 내 생각보다 더 어수선했던 모양이다. 딸이 애인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 나는 내 딸이 좋아하는 남자라면, 네가 좋다면 보내련다 했다. 그러고서 딸이 데려온 남자는 속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싹싹해 보이긴 했다.


네가 좋다면 좋은 거겠지, 좋은 사람이겠지. 그러나 결혼 준비를 하는 딸애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네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남자는 빚이 많은 사람이었고, 액수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정확한 액수를 꽁꽁 숨기고 있던 남자는 딸애가 거듭 물으니 그제야 대출 금액을 밝혔다고 한다. 딸애는 몇 주 동안 아무에게도, 엄마인 나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혼자 괴롭게 끙끙 앓았을 딸애의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꽉 막힌다.


왜 엄마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냐는 나의 말에 딸애는 엄마를 실망시킬까봐, 라고 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 남자를 많이 좋아한다고, 그래서 모든 걸 같이 안고 가려고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첫인사 때 속이 보이지 않던 그 면상이 떠올라 속이 뒤틀렸다.


결혼준비는 당연히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작은 다툼도 더 크게 느껴지고 사소한 일도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는 딸은 몰려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사소한 다툼이 불씨가 되었던 그날, 딸이 홧김에 내뱉은 헤어지자는 말을 남자는 덥석 받아들였다고 한다. 우리는 안 맞으니 잘 맞는 사람 만나라 했다나. 일반적인 파혼 통보였고, 심지어 전화 통화였다.


엄마, 나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어. 결혼을 엎을 마음은 아니었어. 울면서 딸이 말했다. 그 말을 내뱉은 그 입을 없애고 싶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으며, 벽에 머리를 박으며 어리석은 자신을 벌주고 싶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 밤중에 택시를 타고 그 먼 길을 간 것이다. 자신의 집에 찾아간, 결혼을 약속한 연인을 그 남자는 다시 돌려보냈다. 울며불며 사과하고 사죄하며 다짐하고 간청해도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딸은 혼이 나간채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그 말만 되뇌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많은 딸은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 퉁퉁 부어있을 것이며, 정이 많은 내 딸은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아직도 남자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좋아하는 이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다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건만. 누구보다 결혼을 두려워하던 딸이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욕이 튀어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찾아가 저주를 퍼부으며 머리털을 다 잡아 뜯고 싶었다.


내가 가장 분노하고 실망했던 것은 너무나 차가운 남자의 태도였다.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던 나의편과 서럽고 쓸쓸했던 내 결혼 생활이 떠올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안 된다, 내 딸은 안 된다.

울다 소리치다, 절규하다 오열하다 지친 딸에게 솟구치는 마음을 누르며 나는 말했다. 내 딸을 그런 놈에게 보내지 않아 너무나 다행이라고.


나를 닮아 이렇게 사람을 잘 믿는 너를, 나를 닮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너를, 또 나를 닮아 정이 많은 너에게 사랑을 담뿍 주는 이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내 딸, 사랑하는 아이야. 눈물이 마를 때까지 실컷 울렴. 그리고 툴툴 털어버려라. 너무 걱정하진 않으마. 너는 나를 닮았지만 나보다는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걸 엄마는 알고 있단다.


행복은 나와 너, 우리 도처에 있고 너는 밝은 눈으로 그것들을 잘 알아보리라 믿는다. 언제나 건강하고 안전하길. 우리 딸내미,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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