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집은 열 평 남짓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셋방살이를 시작한 지는 몇 년이 지났다. 터무니없이 주방이 길고 수납공간이 부족한 옛날식 아파트는 많지 않은 돈으로 독립을 시작하는 나에게 첫 집이 되어주었다.
이 넓은 도시에서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몸 누일 곳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지만 타지 생활은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사람도 건물도 엉성하게 늘어서 있는 나의 고향 작은 도시에서와는 달리 이곳은 아침마다 대체 어디에서 사람들이 구석구석 쏟아져 나오고 왜 고개를 들어도 하늘 한 점 보기가 어려운지. 나는 때때로 영문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지난 주말에는 아래층에서 천장에 물이 샌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나 있는 방에서 물이 새는 것 같다고 집주인 박말금씨(가명)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겠단다. 원인이 되는 지점을 찾으면 그 부분을 뜯어내야 할 수도 있다고.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처음이라 부랴부랴 방에 있는 물건들을 다 꺼냈다.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정리가 아니라 꺼내서 옮기는데만. 짐이 끝도 없이 나왔다. 이 많은 물건들을 내가 다 샀다고? 짐들이 바닥을 빼곡히 메워 발 디딜 틈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직감했다.
아 이거 청소 각이다. 이렇게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집 전체는 끝내지 못했다.) 취향에 맞지 않아 선물 받고도 쓰지 못하는 각종 소품, 인형 그리고 양말도 잠옷도 왜 이렇게 많은지. 에코백도 너무 많고 다 쓴 화장품 통과 신발 상자, 각종 종이봉투와 비닐봉지는 왜 수집하고 있는지. 오래된 통장과 카드, 안 쓰는 설명서와 다 쓴 공책과 철 지난 자격증 문제집 그리고 전애인과의 러브레터까지. 이 좁은 방 어디에 이것들이 들어있었던 걸까.
몽땅 꺼내놓고 정리를 시작했다. 정리는 또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릴 물건을 고르고 버리기 아까운 물건은 나눔 하거나 당근마켓에 올리려고 따로 모아두었다. 자리를 못 찾고 있는 물건들은 비슷한 것끼리 모아 담아두어야 했다.
정리를 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있기도 했다. 직장을 옮길 때 친한 동료가 써주었던 카드, 오래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목걸이와 귀걸이도 나왔다.(은 목걸이가 새까매져 있긴 했지만) 한 때 그림에 꽂혀있었을 때 야금야금 장만한 미술 도구 상자, 공연 보고 주워 온 포스터도 있었고 심지어 3만 원도 발견했다. 유레카!
몇몇의 발견을 빼고는 죄다 버리거나 없애야 할 것 투성이었다. 언젠가는 쓸 것 같다고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 후련하게 정리해 버렸다. 있었는지도 모를 물건들에 내어주기엔 지금 나의 공간은 한 뼘이라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건 청소를 하면서 조금씩 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독립한 지 수년이 흐르면서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한지 수년 이 흐르면서 나도 몰랐지만 스스로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치열한 사람들, 뭔가를 이룬 사람들. 그들을 보며 전전 긍긍한 나날들을 보내다 이번 기회에 물건을 정리하며 문득 지난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아, 내가 이걸(이 사람을) 좋아했었지?'
'이건 왜 버리지 못했었을까.'
' 이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산 거지?'
지나온 물건들은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체된 마음만큼 정체된 물건들이 있었다. 나의 공간을 갑갑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정리하고 나자 후련함이 밀려왔다. 아주 오랫동안 밀려두었던 숙제를 해결한 기분. 예상치 못한 대 청소가 어쩌면 요즘 갑갑했던 나의 일상의 돌파구가 되어준 건 아닐까.
이제는 털어버리고 비워버려야 할 때가 어떤 순간인지 알고더욱 단순 명료하게 살고 싶다. 물건을 들일 때는 좀 더 신중히 고민을 해 보고 정리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비워버리는 삶. 생각은 가볍지 않게 하되 비워야 할 마음은 얼른 털어버리는 삶. 앞으로 삶의 방향이 조금은 또렷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