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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Oct 23. 2023

큰 것과 작은 것

자기 것을 잘 찾자


 일전에 제가 ‘잃음과 얻음의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만, 내용이 그림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된다고 생각해서 조금 변주해 보려 합니다. 큰 그림과 작은 그림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는 전적으로 화가의 선택에 달려 있고, 이에 필요한 능력을 보통 ‘호흡’이라고 일컫습니다. 아마 예술계에서는 다 비슷하게 통용되는 표현일 것입니다. 자신의 호흡이 어느 정도 크기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해요. 마라톤 선수와 단거리달리기 선수의 호흡이 결코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듯이, 큰 그림에 적합한 호흡과 작은 그림에 적합한 호흡은 명백히 다르니까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하면 그림의 크기에 따라 ‘밀도’가 들쭉날쭉해지는데, 무언가 덜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너무 과하게 그린 느낌이 들게 되지요.




 이는 얼마나 자유롭게 그림 그리는 도구를 놀리는지와는 조금 다른 문제랍니다. 큰 캔버스에 춤추듯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반드시 호흡이 잘 다듬어졌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림에서의 자유는 화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얼마나 여과 없이 잘 드러내느냐에 달렸을 뿐, 동작이 자유로워지면 도리어 형식과 반복되는 결과물에 갇힐 위험이 생깁니다. 잭슨 폴록이 드리핑 기법을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최대한의 우연성을 추구했지만, 결국 그도 뿌리기만 하는 행위에 질려 표현주의로 회귀하고자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호흡과 밀도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요. 꼼꼼히 섬세하게 그리건, 좍좍 그어 그리건 방법은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화면 안에서 얼마나 숨을 쉴 수 있고 얼마나 높은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는지만이 중요할 뿐이랍니다.


 당연히 처음부터 호흡과 밀도를 잘 알고 작업에 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 둘을 알아가지요. 그러나 정말 무서운 일은, 오랜 시간 동안 작업을 했음에도 그 선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스스로는 이미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대충 두서없이 그려 놓고서 좋은 작품이라고 자만하는 것이지요. 호흡과 밀도는 앞에서 제가 말한 ‘정당성’과도 관련이 있기에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기술일지라도 발전 정도와 관계없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으면 실질적으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려요. 그런 채로 어제와 똑같은 작업만을 한다면 그것은 그저 물감 묻히기나 색칠놀이만을 반복하는 상태나 다름없지요. 즉 단지 오랜 시간 동안 실력을 연마했다고 해서, 혹은 자기에게 맞다고 여겨지는 크기의 작업을 계속 해왔다고 해서 좋은 결과물을 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시점에 착각을 하게 되든지 그것이 계속 이어진다면, 손기술만 발전하고 작업의 의미는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현대미술에서 손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주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쭉 해 왔던 방법을, 그것도 오랫동안 해 온 일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거기에 자존심까지 끼어든다면 발전할 여지가 더 줄어들게 되고요. 이는 저도 늘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못하지나 않을지 고민하는 일이 더 힘들지요.




 아무튼 크기에 관계없이 작업을 잘 마치는 것은 모든 화가들의 이상일 터입니다. 한편으로는 커다랗고 압도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화가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캔버스든 종이든 크기가 클수록 좀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공간만 허락해 준다면 굉장히 힘이 센 결과물을 내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그림들은 크기가 작은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이나 공간, 노동력의 한계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작은 그림에서는 화가의 개인적인 면모나 그림에 붓는 애정 등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니까요.


 <모나리자>,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등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들은 아주 작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도 크기가 작지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초~중기 포토페인팅 작품들 중에서도 작은 크기가 많고요. 이중섭의 작품들 중 다수는 담뱃갑 은박지에 그렸는데도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이들을 보면 크기와 작품의 힘 간에는 상관관계는 있을지언정 인과관계는 없는 듯합니다.


 반대로 <나폴레옹의 대관식>, <게르니카> 등은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사이 톰블리 등의 추상화 역시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지요. 크기만큼 힘들도 대단해서 그 앞에 선 사람들은 그림 안으로 빨려드는 느낌, 심지어는 그림이 자신을 향해 넘어져서 덮치는 느낌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예시들을 떠올려 보면 확실히 큰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힘은 또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작은 그림에서 보이는 밀도와는 다른 종류의 밀도, 과분함이라고는 조금도 엿볼 수 없는 그 호흡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어쨌든 그런 대작을 만들어낸 이들의 시야는 아주 넓은 것이 분명합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자기만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저는 몇 년간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추상 작업을 그만두고 나서도 1년이 넘은 요즘에 와서야 조금씩 다시 큰 그림을 시도해 보고 있는데, 이전까지 그렸던 것들은 거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덮거나 천을 뜯어내 버렸지요. 수영을 배울 때도 처음에는 호흡이 쉽지 않아서 고생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나중에는 꽤 오랜 시간 숨을 참을 수 있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짧고 얕은 호흡으로 100호(162cm * 130cm) 이상의 그림을, 큰 크기에 대한 선망만으로 무작정 그리려 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허우적거리면서 숨을 쉬느라 마무리가 늘 엉망이 되었어요. 잘 나가다가 어딘가에서 삐끗, 마무리를 하고 나니 무언가 부족, 시작부터 너무 막막해서 그릴수록 점입가경, 그런 상태였지요.


 추상 작업은 제가 큰 그림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니까 큰 그림에 맞는 호흡을 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려주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손이 꽤나 많이, 오랜 시간 동안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많이 그리고 오래 그릴수록 같은 조형요소라도 여러모로 다양하게 보일 수 있으니 아무래도 그럴밖에요. 그러나 추상 작업을 그만두고 새로 시작한 지금의 작업 방향은 각각의 조형요소가 잘 드러나기에는 매우 껄끄럽습니다. 모든 것이 뒤엉키고 달라붙은 모습을 그리자니 물감을 빠르고 묵직하게 쓰면서도 적절하게 뭉개야 했는데, 하나하나 롤러로 물감을 찍어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방식에 비해서는 확실히 빈 공간이 많이 드러났거든요. 살짝 마른 후에 물감을 추가로 올려서 그들이 서로 엉기는 과정이 필요하기에 결국 소요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물감이 뭉개지면서 형태는 고사하고 색들까지 함께 우그러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큰 작업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우선 작은 작업을 수십 개 가량 진행했답니다. 제 발 크기부터 몸통 정도 되는 크기까지 조금씩 그림 크기를 키워 가면서, 어떻게 하면 빈 공간이 그저 텅 비지 않고 무언가로 채워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요. 우리가 사는 이곳은 무엇으로든 채워져 있고 텅 빈 곳이란 결코 없으니까요. 형태로서 드러나는 조형미는 포기해야 했으니,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조금 생각해 보니 추상 작업을 하면서 무너뜨린 형태를 색으로 더 보완할 수 있겠더군요. 또한 규칙적인 행위로 화면을 채우지 못한다면 불규칙적인 행위를 더 다채롭게 시도해서 비어 있는 곳 전부를 적절히 감싸 줄 수 있었고요. 물론 여기에는 어느 정도 숙련이 필요해서 큰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까지 6개월 가량이 더 걸렸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100호 이상을 그려내기가 이전만큼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호흡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화면의 어느 부분이 부족한 상태인지를 보다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요.




 더 넓은 작업실을 가지게 되면 3m 가까운 크기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작업 방식은 물감이 말라 가는 시점을 잘 잡아야 하기에, 어느 정도 이상의 캔버스는 사용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크기가 너무 커져 버리면 한쪽을 그리는 동안 다른 쪽 물감이 다 말라 버릴 테고, 그러면 다시 물감을 올려서 모양새를 맞춰야 하니 색이나 두께에 차이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들쭉날쭉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이고요. 그러느니 안 하고 말지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것의 중요성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증명해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정말로 위험한 것은 과대평가라고 생각해요. 잘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잘 해 왔고 잘 될 것이다 등등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일은 분명 우리 삶에 필요하기는 하지요. 그러나 평생을 걸고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루고자 한다면 자신에 대한 확신보다는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제가 말도 안 되게 큰 그림을 그리려는 욕심에, 부적합한 호흡을 억지로 사용한다면 밀도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한심한 결과물만을 얻게 되겠지요. 질 떨어지는 작업을 하느라 날린 시간과 돈은 덤입니다. 이는 작은 그림에 너무 큰 호흡을 사용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겠고요. 저는 그것이 정말로 싫습니다. 그나마 더 어렸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라도 있었지, 이제는 치기 따위는 되도록 없어야 하지요. 최소한 작업할 때만이라도요.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의 욕구와 능력은 비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들은 스스로 어느 경지에 도달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 상황에 맞는 호흡을 통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괜찮은 밀도를 끌어내는 것, 손기술이 아닌 감각이 숙련되는 것이랍니다. 나이가 더 들었을 때, 그저 오래 그렸다는 이유로 제 자신의 위치를 함부로 확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경험치가 화가로서의 제 인생에 유일한 방어막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가 존경하는 화가 중 한 분인 클리포드 스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지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물감을 묻힐 수는 있다.”


 바보인 채로 나이 들고 싶지는 않군요. 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맞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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