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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ard Writer Oct 15. 2023

#4. 참을 수 없는 취향의 가벼움

취향, Artist Child in Hawaii 4/12

다른 곳이 아닌 하와이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연중 비슷한 날씨인 것. 그렇게 꿈꾸던 프랑스에 갔다면 낭만은 있었겠지만, 스산한 가을 그리고 겨울 날씨에는 혼자 몹시 쓸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그보다 현실적으로 좋은 점은 옷차림이다. 만약 가을·겨울 옷을 다 짊어지고 간다면 그 짐을 다 어찌하리. 옷을 좋아하는 나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다.


하와이에서는 기본적으로 반바지와 반소매 혹은 민소매면 충분하다. 내 최애 조합은 5부 기장의 부드러운 고무줄 반바지와 니트 민소매다. 하반신이 튼튼한 나는 한국에서 5부 기장 반바지 입기가 민망했지만, 여기에서는 나도 날씬한 편에 속한다. 아니, 그런 시선 자체가 무의미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본인 외에는. 설사 구멍 난 티셔츠를 입었더라도.


더운데 아무리 민소매라도 니트 소재를 어떻게 입을까 생각하겠지만 하와이는 습도가 낮아서 전혀 덥지 않다. 게다가 에어컨을 심각한 수준으로 강하게 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부피감 있는 옷은 차 안이나 실내에서 체온 보호에 도움이 된다. 도톰하고 찰지게 구성된 니트 민소매를 여름에 입을 수 있다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의식주에서 가장 첫 자에 나오듯이 우리가 입는 옷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 중에서도 으뜸이다. 중국에서는 식의주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의식주라고 하는 이유는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이라는 설을 들었다.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데, 원시 시절에 벌거벗고 살 때는 의식주 문화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의식주는 어느 정도 사람의 문명이 있고 나서의 형태로 해석되고, 그렇다면 일단 알몸은 가리고 부끄러움은 면한 후에 만나서 사냥도 하는 게 순서가 아닐지 싶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잎으로 몸을 가린 것을 생각하면 의식주라고 부르는 것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하와이로 올 때 여름옷 중에서도 하와이에서 입을 만한 것만 나름 엄선해서 골랐다. 20년 전이기는 하지만 하와이에 잠시 살아본 적이 있고 여행도 많이 다닌 데다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춰 옷 입기 좋아해서 보통 때 입을 옷, 업무상 입을 옷, 특별한 날 차려입을 옷 등을 적절히 구성해서 짐을 꾸렸다. 하지만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고 현지 분위기에 맞는 옷이 있어서 어차피 어느 정도 물갈이가 될 것이라고.


예상은 적중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옷은 가져온 게 아까워서 한 번씩 맛보기로 돌려 입고 그나마 업무용 혹은 특별한 날 의상만 빛을 발한다. 수영복과 운동복을 입는 경우가 90%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옷장에 있는 옷 대부분은 다시 싸서 한국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지경이다.




이렇게 옷 이야기를 길게 푸는 이유는 옷이야말로 생활 방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 혹은 내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비치, 그리고 운동이다. 눈 뜨면 바다 산책, 아침 먹고 운동, 오후에 일을 좀 보다가, 해 질 무렵 다시 석양을 보러 바다 산책, 저녁 먹은 후 정리하면 잘 시간. (굵직하게 나누면 간단해 보이지만 이 사이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한다) 그러므로 별다른 약속이나 외출이 없다면, 와이키키에서는 수영복 차림으로 있다가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녀도 무방하다. 한국에서는 연세 드신 분들이 민망해서 눈을 어디 둘지 모르겠다고 하실 바이커 쇼츠가 교복 수준이고. 이런 옷차림이면 신발은 당연히 조리나 운동화.


한국에서 입던 옷과 라이프스타일을 비교하면 거의 180도가 바뀌었다. 이처럼 바뀐 옷차림,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은 내 취향과 인식의 변화를 말해준다. 한국에서 옷은 내 개성을 표출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적 수단이다. 꼭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그런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 모양이다. 옷으로 나를 표현하고 행복해지는 것보다 다른 수단이 더 많기 때문일까? 매일 똑같은 옷만 입고 나가도 상관없는데, 오히려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가고 싶은데, 여전히 약간은 옷에 대한 부심(負心)이 있고, 하와이가 좁으니 혹시 누가 보면 매일 같은 옷 입는다고 할까 봐 돌려 입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요즘에 일주일 내외의 단기 여행보다 한 달 살기나 석 달 살기 등 장기 여행이 유행하는 것도 현지의 생활과 문화를 체험하고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게 아닐지 싶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여유가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 돈과 시간을 반드시 이렇게 쓸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주요 관광지만 쓸어 보고 현실로 돌아가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남은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관광보다는 더 넓은 의미의 여행을 누리는 여유가 우리에게 생긴 듯싶다.


일각에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아끼고 투자하는 것보다 현재에 충실하겠다며 여행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유행과 대세를 따라 아무런 자기 생각 없이, 여행도 관광처럼 소비하는 것은 문제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살다 보면 사람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이 바뀔 때 취향과 인식의 변화가 수반되면서 더 이상 소용없는 옷이나 소지품을 내다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별 의미 없어지는 현상에 스스로 놀라는 그런 경험. 만약 그렇게 내면의 무언가가 바뀌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요즘 유행하는 장기 여행도 값진 투자다. 나의 취향이 얼마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인가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이 글은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으면서 12개 챕터마다 와닿은 문구에 하와이의 일상과 나 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엮은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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