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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ard Writer Oct 22. 2024

#8. 완벽한 하루들과 영화 볼 결심

실천, Artist Child in Hawaii 8/12

아침이다. 시간은 대중없다. 눈이 떠지면 이불을 걷어내고 누운 채로 네 가지 몸동작을 한다. 정신이 들면 코코넛오일을 한가득 입에 머금고 요가 스트레칭을 한 후 물샤워를 한다. 얼굴에 토너 팩을 올려두고 라나이(lanai)에서 모닝페이지를 쓴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생각을 엉킨 머리 풀듯 헤쳐내는 시간이다. 아침 식사는 요거트에 그래놀라, 혹은 우유에 치아시드와 당근과 오트밀을 전날 넣고 불려두었다가 꿀을 넣는다. 사과를 얇게 잘라 레몬즙을 두르고 땅콩버터 한 스푼을 올린다. 커피는 디폴트. 이제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12시가 되면 간단하지만 건강한 한 그릇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고 다시 커피 한잔. 이제 그날 할 일을 처리한다. 오후 5시가 되면 간단한 저녁을 먹는다. 또띠아 한 장에 시금치, 토마토, 계란, 치즈를 올려 구운 후 꿀을 두른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알라모아나 공원으로 향한다. 지는 해를 보며 해변을 걷거나 뛰는 시간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낮이 밤으로 바뀐다. 이어서 근력유산소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다. 시간이 남으면 반신욕도 하고 잘 준비를 한다. 오후 10시다.




행사나 약속이라는 변수가 없는 한 거의 똑같은 하루. 완벽에 가까운 날들이다. 그날이 그날 같지만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헷갈릴 일은 없다. 매일 쓴 모닝페이지가 다르고 읽은 책이 다르고 처리한 일이 다르고 산책 길에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이 다르니까. 다른 점이 또 있다면 금요일은 점심식사 후 장을 보고, 토요일은 오전 내내 친구들을 만나고, 일요일은 오전에 교회에 갔다가 오후에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혹시 아이 같은가? 한국에서도 평일 저녁에는 웬만하면 약속을 잡지 않았다. 하루는 중국어, 하루는 비올라 레슨이 있고 간혹 회식이나 모임이 있을 수도 있다. 지인들은 내게 무슨 학생이냐고 놀렸다. 학교 끝나고 학원 도는 애들처럼 산다고나 할까.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 웃었다. 하지만 내심 더 하고픈 걸 못하는 욕구불만이 있었다. 하와이에서 누린 거의 완벽한 하루들도 그랬다. 하루가 30시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오전에 두 시간은 외국어 공부를 하고 한 시간은 악기를 연습하겠다. 오후에 두 시간은 영화를 보고 한 시간은 수영을 하겠다. 이것이 나에게 완벽한 하루다. 하루가 24시간인 상태에서 이걸 다 하면 잘 시간이 없다. 그건 안 된다.




시간에 얽매이고 나이를 핑계 삼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줄리아 캐머런은 완벽한 하루를 상상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하나라도 오늘, 당장, 바로 실천하라고. 이미 완벽에 가까운 나의 하루가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나는 이 중 영화를 한 편씩 보는 걸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어 공부나 악기 연습이나 수영은 어쩌다가 30분이라도 해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보다 더 시간을 요하니까 다른 걸 다 하면서 매일 하기는 도저히 어렵다. 나른한 오후에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보는 영화 한 편이라니. 요즘 내 일상에서 그걸 매일 할 수 있다면 꿈이지 현실은 아닐 것이다.  


사실 완벽한 하루를 상상해 보라는 제안은 이렇게 달콤한 꿈에 젖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미루는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일주일 혹은 한 달에 한 편이라도 개봉하는 영화를 챙겨보기로 했다. 하와이에서는 매주 화요일에 영화표가 저렴하다. 한국처럼 아침 일찍 조조할인이 있는 게 아니라 화요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인을 해준다. 영화표도 비싸기 때문에 화요일 할인을 받아야 한국에서 보는 가격대를 누릴 수 있다. '바비', '나폴레옹', '플라워 킬링문', '웡카'  뿐 아니라 '서울의 봄'이나 '파묘'같은 한국 영화도 봤다.


영화 보러 극장 가기는 아티스트 데이트의 일환이기도 했다. 아티스트 데이트란 자기 자신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이다. 동행자에게 맞추어주고 상호작용하는 대신 홀로 오롯이 자기 내면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는 뜻이다. 영화를 보고 느낀 모든 감상을 스스로에게 묻고 설명하고 정리하는 시간. 사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스크린만 보고 집중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러 가는 걸까? 영화만이 목적이 아니고 영화 보는 시간을 함께 즐기고 영화 내용으로 더 많은 공감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면 모를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 하와이에서는 유독 그런 순간이 많았다. 하나우마베이에서 1시간마다 쉬는 시간을 알려줄 엄마 없이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갛게 탈 때까지 쉬지 않고 스노클링을 했을 때, 라니카이 필박스에 올라 음악을 틀어 놓고 신나게 춤을 췄을 때, 오리발까지 야무지게 끼고 알라모아나 해변 이쪽에서 저쪽까지 바다수영을 하다가 여느 때처럼 매직아일랜드 위로 뜬 쌍무지개를 보며 기뻐했을 때 그랬다. 무엇보다도 하와이 가기 전에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친구들과 함께여서 더 그랬다. 나이 들어 사회에 나온 이후에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다시 친구를 사귀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어린아이가 된 느낌은 만족스러운 영화 보기 같은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고 난 후에도 든다. 나 자신과의 시간을 즐기고 더 많은 공감과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으로 영화를 신나게 한 편 보고 나면 정말이지 의기양양해진다. 어린아이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데, 창조성의 흐름에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창조성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그 순간이라는 것은 세월에 매이지 않는다.




창조성은 행동을 요하고(Creativity requires activity), 그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줄리아 캐머런의 말처럼 행동하지 않고는 창조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녀는 100편 이상의 영화 에세이, 영화 인터뷰, 소고, 트렌드 분석, 미학 분석 등을 썼다고 한다. 내가 진짜 영화감독이 될지는 몰라도 그보다 먼저 영화에 관한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아이는 영화를 만들 만한 창조성이 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을 해보라고 말한다. 예컨대 내가 본 영화를 글로 한번 풀어보라는 것.


 “은퇴한 다음에 해야지”라는 말의 이면은 “이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억제하려는 핑계를 돌려 말한 것뿐이라고 한다. 젊은이에게 뭔가 시도할 자유를 주는 것만큼이나 나이 든 사람은 약간 기행적인 행동을 해도 눈감아주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쓰고 싶으면서도 그런 것은 은퇴 이후라고 미루는 내 마음이 뜨끔한다. 캐머런은 영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늦게 시작한 학생 가운데서 최고의 영화인이 많이 배출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말에 용기를 지긋이 내본다.




이 글은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으면서 12개 챕터마다 와닿은 문구에 하와이의 일상과 나 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엮은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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