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zard Writer Oct 24. 2024

#9. 멍 때리기보다 중요한 것

놀이, Artist Child in Hawaii 9/12

"재미있게 지내는 걸 잊지 마(Dont' forget to have fun)!" 20년 여 년 전 나를 두고 먼저 캄보디아를 떠나던 미국인 친구가 했던 말이다. 그 친구 눈에도, 그 어린 나이의 나는 타지에서도 꽤 진지하게 지낸 모양이다. 내가 아끼는 지인 중 하나는 배우자 조건 중 하나가 유머 감각이었다. 세상풍파를 지내는 동안 유머는 굉장히 훌륭한 힘이 된다고도 들었다. 그런데 내게는 글쎄... 정말 중요하고 중요한 걸 딱 세 가지만 꼽아야 한다면 그중에 유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재미'보다는 '의미'가 더 중요한 인간이므로. 


이만하면 나에게 '놀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것이다. 하와이에 올 때 '멍 때리는 법' 세 가지를 적어 준 직장 선배 이야기를 앞에서 한 적이 있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해대는 나, 그런데 이 멍 때리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무작정 노는 것이다. 물론 나도 나름의 방법으로 놀기는 하지만 여기서 '논다'는 것은 목적의식 없이, 아이처럼, 때로는 바보처럼 노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놀기도 생산적으로 하는 사람이므로 차라리 멍을 때리며 휴식을 취하면 모를까 그렇게 비생산적으로 놀다니! 왜 그렇게 놀아야 한단 말인가! 더 잘 놀 수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는 걸 보면 '저게 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놀이를 통해 아이들이 자라듯이 놀이가 바로 창조성을 풀어놓는 실타래인 모양이다. 쓸모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재미가 있기 때문에 딱지나 카드를 모으는 아이 같은 행동, 그렇게 해보지 않은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래서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서 제안하는 기본 도구 중 하나인 아티스트 데이트를 통해 이런 놀이를 부활시켜 보기로 했다.  




어디에 가면 즐겁고 설레는가, 어른이 된 나에게 딱지나 카드는 무엇인가. 딱히 무언가를 사지 않더라도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곳. 나는 서점, 편집숍 같은 곳을 떠올렸다. 대신, 서점에 가더라도 책을 보지 않고 잡지 코너에 가기로 했다. 잡지 한 권을 사서 그 안에 있는 것을 오리고 붙여서 살고 싶은 집, 갖고 싶은 가구, 타고 싶은 자동차 등 원하는 것을 모아 보기로 했는데 도무지 살만한 잡지가 없었다. 겨우 고른 것은 Luxury 어쩌고 하는 하와이의 풍요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는 잡지였다. 그 녀석이 아주 너덜너덜거릴 정도로 가위질을 해서 꿈의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간 곳은 숨어 있는 보석 같은 편집숍. 와이키키에 있는 것도, 대로에 있는 것도 아니고 건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갈 수 있다.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에 흩어져 사는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사들인 전통 공예품을 파는 Na Mea Hawaii라는 가게였다. 말 그대로 "하와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라는 뜻이다. 나무껍질을 짓이겨 천처럼 펴서 만든 머리띠와 두툼한 나무젓가락 한 벌을 골랐다. 천연염색한 반다나도.


좀 더 아이스러운 것이 없을까? Na Mea Hawaii를 오가는 길에 어린이 용품을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옷은 기본이고 일본에서 들여온 학용품, 장난감, 그리고 도장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래, 도장! 나는 지인들에게 선물할 때 손수 만든 카드 주기를 좋아한다. 그림은 어떻게 그려보겠는데 글자를 그림처럼 넣는 것이 어려웠다. "Happy Birthday", "Thank you", "Congratulations" 같은 것들 말이다. 도장을 보는 순간 어찌나 반가웠던지! 일본 가게답게 같은 문구라도 크기며 스타일이 어찌나 다양한지 고르는데만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는 한 번 더 가서 또 샀다.




서점과 편집숍과 도장 가게를 다니면서 나는 어린 시절 문구점과 팬시점이 생각났다. 저학년 때는 학교 앞 문구점이 놀이터였고, 더 자라서는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팬시점에 갔다. 대단히 유행이 빨라서 매주 다른 상품이 진열되는 것도 아닌데 주말마다 나갔다. 말 그대로 놀이터였다. 그냥 목적 없이 이것저것 살피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져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그것이 놀이였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다시 좋아하는 물건을 구경하고 사는 것을 놀이로 여기는 것을 발견했다.


줄리아 캐머런은 예술가가 되려면 엄청난 훈련을 거쳐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군대 훈련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훈련은 배터리 같은 것이어서 얼마간 소용이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긴 호흡으로 보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훈련보다 열정을 요구한다. 열정은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창조적인 과정에 대한 정신적인 동의이자 애정 어린 항복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창조성에 대한 애정 어린 인식이라고 한다. 열정은 삶의 흐름에 왕성한 활동력을 공급하는 에너지인데, 이 열정은 일이 아니라 놀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 생활에서 '놀이'를 부활시킨 것은 주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창조적인 것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되었다. 딱지와 카드를 다시 모으는 것 같은 즐거움도 있었다. 창조성이 막히고,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게으름과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 캐머런은 그런 두려움을 다스릴 토템으로 자기만의 인형이나 장난감 같은 것들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두려워질 때, 나에게는 하와이에서 가져온 도장들이 토템이 될 것 같다.




이 글은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으면서 12개 챕터마다 와닿은 문구에 하와이의 일상과 나 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엮은 시리즈입니다.

이전 09화 #8. 완벽한 하루들과 영화 볼 결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