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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zard Writer Oct 25. 2024

#12. 자화상의 역설

변신, Artist Child in Hawaii, 12/12

호놀룰루미술관 현장에서 자화상 그리기 수업을 한 적이 있다. 하와이 주권 회복 운동 프로젝트에 참여한 하와이 로컬의 얼굴이 모여 있는 갤러리였다. 과제는 이 중 얼굴을 하나 골라 그려보기. 나이가 들면 어떤 얼굴이 되고 싶은지 골라보기로 했다. 하와이의 알로하 기운이 잔뜩 묻어 나는 미소를 띤 얼굴, 우아하고 인자한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끌린 얼굴은 위엄과 결의가 뚝뚝 떨어지는 분이었다. 이번 전시의 저항 정신을 가장 잘 살린 표상인 것 같기도 했다. 남자 얼굴인 데다 나이 들어 그렇게 비장한 얼굴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했다.


"이 남자분..."하고 내가 질문을 하는데 선생님이 "여자분이에요"한다. 하와이 로컬은 남자도 머리를 기르고 치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부족 대표인 줄 알았다. 한참 그리는데 선생님이 설명했다. "이 교수님은 이 운동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어요.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다. 우리는 하와이인으로 죽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진은 눈높이가 동일하고 정면을 응시하는데, 이 사진만 위를 바라보는 측면 사진이에요. 이 프로젝트에서 촬영한 게 아니라 아마 이 분의 상징성 때문에 따로 추가한 것 같아요."


Haunani-Kay Trask(1949~2021),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 정치학 박사로 하와이학과 교수이며 시인이자 운동가, 유엔 하와이 원주민 대표를 역임했다. 직접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쓴 다큐 영화도 있다. 사진에서 이 분의 시선이 위를 향하는 것은 그의 정신이 현실이 아니라 이상을 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나는 뜻하지 않게 선택한 이 인물에게 정신적 유대감과 존경심을 느꼈다.




두 달여에 걸친 자화상 그리기 수업이 끝났다. 첫 수업은 거울 위에 투명한 비닐을 올리고 내 얼굴 윤곽을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까지 종이에 완성한 내 얼굴은 웬일인지 짝짝이다. 반쪽은 밝고 자신 있는 반면, 다른 반쪽은 무언가를 염려하듯 슬퍼 보인다. 반쪽씩 가리고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다른 표정, 다른 사람이다. 미술 실력이 부족해서 짝짝이가 됐을 수도 있는데, 나는 이 결과물이 마음에 든다. 우연이든 실수이든 내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을 추구하지만 최고보다는 최초를 갱신하는 개척 정신을 사랑한다. 성취 지향적이고 분석적이고 조직적이다. 이미 이십 년 전에 나를 본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커리어우먼으로서 기대된다고. 그런가 하면 영적이고 감성적이고 민감하다 못해 취약한 면도 있다. 동생은 이런 나를 "유리 멘털"이라고 했다.

 



사회생활 초반에는 나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힘들었다. 힘겨운 연애 때문에 당장에 슬퍼 죽겠는데 회사에서는 멀쩡한 척 일을 해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대안이 없기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은 성격 테스트를 하면 원래 내 기질과 전혀 다른 것들도 나온다. 회사 생활이 나를 훈련시키고 다듬은 시간이 장점으로 정제되어 고맙고 신기하다.


한창 힘들었던 시절, 세미나에서 어느 의사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질문했다. 내 기질은 지금 하는 일과 너무나 동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신기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신념형'인 경우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 기질과 맞지 않아도 신념을 가지고 해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난 후 내면의 갈등과 부침이 많이 이해되고 해소되었다.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내 질문에는 그보다 내면의 욕구를 취미로 푸는 것을 추천하시며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셨다.


취미에는 창조적으로 유용한 면이 숨어 있다...

대부분의 취미는 예술적 두뇌를 굴리는 활동인데,  이것이 기막힌 창조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취미활동은 정신적으로 이롭다.
거기에는 어떤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소박한 해방감이 있다.


생활이 안정되고부터 매년 하나씩 취미를 시작하고 있다. 중국어를 시작으로 그림, 비올라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회의와 출장이 잦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런 취미는 나를 고달프게 하거나 진을 빼기보다 오히려 우뇌를 자극시켜 창조의 돌파구를 마련해 준 모양이다. 이유를 모르고 했던 일이지만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캐머런은 아이디어가 ‘생각의 아기’이기 때문에 여느 아기들처럼 창조의 자궁에서 조급하게 꺼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아이디어가 잘 자라고 있는지 보겠다며 뿌리째 잡아당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이디어는 네모 반듯한 벽돌이 아니라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며 빵 굽는 일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내게 필요한 다음 단계는 내 안에 설익은 아이디어를 함부로 잡아당기지 않고, 빵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기다리는 공손한 침묵이다. 건강을 생각해서 아몬드 빵을 만들어 보았는데 나는 이것 하나 익히는 데도 오븐을 서성이고 찔러보고 야단이다. 급한 성질을 양껏 부리면서 아이디어에 바람 빠지게 하지 말고 빈둥거리며 낙서하는 시간을 진득하게 버티는 여유가 필요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지금의 자리에 오는 데도 20년이 걸렸다. 지금 드는 생각이 영그는 데도 20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때까지 영화와 소설 등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탐구하는 데 힘쓸 것을 약속한다.




이 글은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으면서 12개 챕터마다 와닿은 문구에 하와이의 일상과 나 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엮은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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