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방콕 야시장에서 처음 먹은 바나나로띠는
그때까지 내가 믿어왔던 디저트의 기준을 완전히 부숴버렸어.
바삭한 얇은 반죽, 달콤한 바나나, 농축된 연유. 그 조합이 너무 충격적이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어. "한국에 돌아가면, 이건 무조건 만들어보자"라고.
하지만 그때의 인터넷은 지금처럼 친절하고 다양하지 않았어.
네이버나 다음 같은 한국 기반의 웹 들에서는 바나나로띠 레시피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 영어로 된 레시피를 찾아봤지만, 그마저도 본토의 레시피와는 달랐지.
다른 걸 어떻게 알았냐고? 4개의 다른 레시피로 4번이나 만들어봤는데 그 바삭하고 종이처럼 얇은 반죽이 안되더라구.
나는 다시 구글에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태국어로 번역해서 붙여 넣는 식으로 레시피를 찾았고,
다섯 번째 도전에서야, 드디어 바삭하면서 종잇장처럼 얇게 펴지는 반죽 레시피를 손에 넣었어.
읽지도 못하는 타이 문자를 찾아보면서까지 재현하고 싶을 만큼 태국에서 먹은 바나나로띠는 진짜 맛있었어. 내가 태어나서 먹은 디저트 중에 제일 맛있었고, 독보적이었지.
얇게 펴진 바삭한 반죽은, 놀랍게도 쫄깃하고 촉촉하기까지 해.
툭툭 무심하게 잘라서 내어주는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뜨거운 무쇠 철판 위에서 구워진 반죽은 겉은 바삭한데 안은 쫄깃한 신기한 맛이야. 바나나는 작당히 따뜻하게 익어서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처럼 스르륵 녹아.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바나나 속에 살짝 숨어있는 산미가 그 단맛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 주지. 거기다가 진하고 고소한 연유가 듬뿍 올라가 있는데 익힌 바나나의 진한 향과 연유의 조합은 최고야.
바삭한 빵 부분, 바나나의 농밀한 맛, 연유의 묵직한 단맛, 그리고 그 순간의 여행지 감성까지 다 더해져져서 이건 그냥 디저트가 아니야. 이건 잘 짜여진 구조야. 식감의 대위법. 혀 위에 켜켜이 쌓였다가 천천히 녹아내리면서 뇌를 ‘바나나로띠 찬양’으로 세뇌하려는 로띠의 거대하고 달콤한 계획.
태국의 노점상에서 바나나로띠를 주문하면, 길거리 셰프가 반죽을 펴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가 없어.
마치 바람을 가르는 무술가처럼 현란한 손놀림으로 반죽을 펴고,
그 위에 바나나를 번개처럼 썰어 얹고, 귀퉁이를 섬세하고 반듯하게 접어 올리는 손놀림은 놀랄 만한 수준이야.
그 모든 과정을 넋 놓고 바라보다 보면 내 손에 딱 쥐어지는 뜨거운 바나나로띠.
반죽은 갈색으로 바삭하게 잘 구워져 있고, 반죽 위에는 연유가 윤기 반짝이며 흐르는데,
그걸 입에 넣는 순간이 바로 카타르시스의 정점이야.
‘바삭’하고 반죽이 부서지면서 심장에서 행복 호르몬이 쿵 하고 울리고, 뇌가 살짝 미소 지으면서 속삭여.
태국의 로띠는 종류도 다양하더라.
누텔라 로띠, 플레인 로띠, 딸기, 망고, 파인애플, 심지어 계란이나 모차렐라 치즈까지. 근데 나는 다른 로띠는 로띠로 안 칠래. 느낌이 부족하거든. 내 기준에서 완벽한 디저트가 갖춰야 할 ‘그 무언가’를 가진 건 오직 바나나로띠뿐이야.
나는 바나나로띠만 완벽한 로띠로 인정할 거야.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태국 현지에서 갑자기 내 브런치 글 찾아와
“이 사람은 로띠 흑백논리 자이며, 지독한 바나나 보수주의자이자 디저트계의 흥선대원군입니다!”
이러진 않겠지.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테니까.
내가 직접 바나나로띠를 만들어 먹으려고 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건 반죽을 늘리는 손놀림을 익히는 거였어.
글루텐이 제대로 형성되어 종잇장처럼 얇게 늘어나는 반죽을 만들고 나서도 원하는 넓이만큼 얇게 늘리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기술이었지.
나는 디자이너라고. 일상생활에서 손재주가 부족해 불편했던 적은 별로 없단 말이야. 그런데 로띠 반죽 늘리는 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더라.
반죽 늘리는 연습만 하루종일 했지. 나는 반죽을 얇게 피려고 하고, 반죽은 늘어나지 않겠다고 하고, 그렇게 반죽과 싸우다 화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늘리면 바로 찢어져버리거든. 반죽을 설득하는일은 정말 힘들었지 하지만, 결국 성공했어. 노력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이 그날은 진짜였어.
바나나로띠는 참 신기한 디저트야.
다른 디저트들은 시나몬, 바닐라, 오렌지 제스트, 럼 같은 향신료가 꼭 필요하잖아. 근데 바나나로띠는 다른 향신료의 도움이 필요 없어.
그저, 밀가루, 물, 달걀, 연유, 버터, 소금, 바나나. 이게 끝이야.
그런데도, 완벽한 맛과 향이 나.
이건 마치 신생아의 숨결 같은 순수함, 꽃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같은 작지만 완벽하고 흠 없는 우주의 순결함, 겨울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의 가장자리 빛같이 어떤 존재도 방해할 수없는 울림 같지.
이렇게 바나나로띠 찬양을 늘어놓고 있으니 내가 태국에 여러 번 가서 바나나로띠를 먹은 것 같이 보이지만, 내가 태국에 갔던 건 딱 한번이야. 신혼여행이었어.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지. 그때 나는 순수했어. 향신료가 필요 없는 바나나로띠처럼.
연인과 결혼했고, 내 인생의 새로운 첫 페이지를 써 내려가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
그게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몰랐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한테 이렇게 말했을 거야.
“걱정하지 마, 괜찮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
“방향은 맞았는데, 방법이 틀렸어.”
나는 원래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항상 가던 곳, 항상 머물던 자리, 항상 만나던 사람들과 만나는게 좋아.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야. 다칠까 봐 새로운건 잘 안 하고, 이별하는 것이 무서워서 새로운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길을 잃을까 봐 밖에 나갈 때 망설이고, 실패할까 봐 항상 해오던 것만 반복하는 사람.
바나나로띠는 그런 나에게 전달 된 미래의 메세지였던거야. 밀은 으깨져야 가루가 되고, 바나나는 껍질을 벗어야 하고, 달걀은 깨져야 하고, 설탕과 우유는 불에 달궈져야 하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에서 나오는 말처럼.
내 결혼의 시작을 상징했던 바나나로띠는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던 거야.
향신료 하나 없이, 정직한 재료들로만 완성된 완벽한 디저트. 하지만 완벽해지기 위해서 모든 재료가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야만 하는.
순수한 변화의 맛.
바나나로띠.
ㆍ 강력분 밀가루 200g
ㆍ 소금 1꼬집
ㆍ 설탕 1큰술
ㆍ 연유 2~4큰술
ㆍ 달걀 1개
ㆍ 미지근한 물 80ml
ㆍ 무염버터 40g
ㆍ 요리용 식용류 3큰술
ㆍ 바나나 2개
ㆍ 큰 볼에 밀가루, 소금, 설탕을 넣고 섞는다.
ㆍ 다른 볼에 미지근한 물, 연유, 달걀, 녹인 버터를 넣고 잘 섞는다.
ㆍ 젖은 재료를 마른 재료에 붓고 손이나 주걱으로 한 덩어리가 될 때까지 섞는다.
ㆍ 반죽이 뭉쳐지면 5~10분간 반죽기로 반죽한다.
ㆍ 반죽을 식용유를 바른 그릇에 담는다.
ㆍ 랩을 씌워 실온에서 1시간~최대 2시간 숙성한다.
ㆍ 냉장고에 반죽을 넣고 12~24시간 기다린다(반드시!!!).
ㆍ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내 실온에 두어 차갑지 않은 온도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ㆍ 숙성된 반죽을 넓은 작업대에 식용유를 바르고 손으로 얇게 편다(거의 비칠 정도로).
ㆍ 중불로 달군 팬에 식용유와 버터를 두르고 기름이 데워지면, 얇게 편 반죽을 올린다.
ㆍ 그릇에 계란을 풀어 준비한 뒤 슬라이스한 바나나를 넣고 살짝 섞어준다.
ㆍ 준비한 바나나 토핑을 중앙에 넉넉히 올리고, 반죽의 네 귀퉁이를 안쪽으로 접어 사각형 모양을 만든다.
ㆍ 바닥이 노릇해지면 뒤집어서 반대쪽도 노릇하게 익힌다(필요하면 버터 추가).
ㆍ 양면이 바삭하게 구워지면 접시에 옮겨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ㆍ 연유를 듬뿍 뿌려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