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시장이 된 교실, 그리고 침묵하는 교사
얼마 전, 학생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십원빵’ 가게에 방문했다. 갓 구운 빵 속에 치즈가 늘어나는 그 맛이 궁금해 퇴근길에 들렀다. 가게 안에는 앳된 알바생 혼자 냉장고를 닦고 있었다. 키오스크 앞에 서서 빵 하나를 주문하자, 알바생은 황급히 행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빵을 집어 드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물기가 흥건한 맨손이었다. 행주를 짜던 그 축축한 손으로 빵을 집어 종이봉투에 담자, 봉투 귀퉁이가 금세 눅눅하게 젖어 들어갔다.
순간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다.
‘잠시만요, 위생 장갑을 끼시거나 손을 닦으셔야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알바생이 너무 어려 보여서, 혹은 덩치 큰 성인 남자가 지적하면 겁을 먹을까 봐. 무엇보다 이 좁은 동네에서 학부모나 학생들이 지나가다 보고 "저 선생님, 고작 빵 하나 가지고 유난이다"라고 수군댈까 봐 겁이 났다.
결국 눅눅해진 빵을 들고 도망치듯 차에 탔다. 빵에서는 고소한 치즈 냄새와 비릿한 행주 냄새가 섞여 났다.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지도 앱을 켰다. 가게 이름을 검색하고 리뷰 쓰기 버튼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배회했다. '위생 교육이 필요해 보입니다'라고 적으려다 지웠다. 혹시라도 내 리뷰 하나 때문에 가게 매출에 타격이 갈까 봐, 알바생이 잘릴까 봐, 내가 진상으로 찍힐까 봐. 수만 가지 소심한 걱정 끝에 나는 결국 휴대폰을 덮었다. 배려심 깊은 어른인 척했지만, 사실은 그저 갈등이 두려워 도망친 소심한 평화주의자였다.
차 안에 앉아 식어가는 빵을 보며, 문득 경제학 개념 하나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에 등장하는 레몬 시장(Lemon Market) 이론이다. 판매자는 상품의 품질을 알지만 구매자는 모르는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 구매자들이 속기 싫어 지갑을 닫거나 평균적인 가격만 지불하려다 보니, 결국 질 좋은 상품은 사라지고 겉만 번지르르한 불량품(Lemon)만 시장에 남게 된다는 이론이다.
배달 앱을 켜면 이 이론이 현실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온통 별점 4.9점, 5점짜리 가게들뿐이다. 리뷰 이벤트로 쌓아 올린 5점의 성벽 안에서, 진짜 맛집과 위생 불량 가게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4점 초반만 되어도 '이 가게 무슨 문제 있나?'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별점 인플레이션 시대. 사장님들은 별점 하나에 목숨을 건다. 내가 그날 빵집에서 침묵한 대가로, 그 가게는 여전히 높은 별점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다시 젖은 행주 맛 빵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침묵이 우리 동네를 정보가 차단된 레몬 시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도 이 레몬 시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매년 성적표를 받는 사람이다. 지금은 폐지 수순을 밟고 있지만, 교원능력개발평가 시즌이 되면 동료 교사들은 익명의 칼날 앞에 서야 했다. 실제로 신규 교사 때, 나의 발령 동기는 익명 서술형 평가에서 입에 담지 못할 인신공격과 성희롱을 당했다. 며칠을 앓아눕듯 괴로워하다 교육청에 문의했지만, "작성자를 추적할 수 없다”는 매뉴얼적인 답변만 들어야 했다. 건강한 비판이 아닌 악의적인 비난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상처 입히는지 곁에서 지켜보며,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력감이 학습되어서였을까, 나는 누군가를 평가하고 지적하는 칼자루를 쥐는 일을 최대한 피하게 되었다.
교사 생활 2년 차 때, 우리 반의 아픈 손가락 같은 학생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상습적인 수업 방해로 지도가 필요했지만, 학부모님마저 무조건적으로 아이를 감싸고도는 탓에 지도가 쉽지 않았다. 그때 나는 '믿어주면 반드시 변한다'는 교육적 신념 뒤에 숨었다. 하지만 사실은 학부모님과 얼굴 붉히기 싫은 두려움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가 침묵하면 시장에 레몬이 남고, 교사가 침묵하면 교실엔 문제 행동이 남는다. 나는 그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체육 시간에 공으로 위험한 장난을 치다 체육 선생님께 크게 혼이 났다. 그날 오후, 내 전화기에 불이 났다.
“선생님! 체육 쌤은 왜 우리 애 기죽게 친구들 보는 앞에서 혼을 냅니까? 애 아빠가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학교 쫓아가겠다는 걸 제가 겨우 말렸어요!” 학부모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잘못은 아이가 수업을 방해한 것인데, 추궁은 내가 당하고 있었다.
“어머님, 우선 진정하시고요. 제가 체육 선생님께 당시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끝내 학교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나는 겁이 났다. 또다시 무조건적인 사과를 요구받을까 봐,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학교로 찾아온 어머님을 대하는 체육 선생님의 태도는 달랐다. 선생님은 학생부장 경험이 있는, 젊지만 매우 노련한 분이었다. 흥분한 어머님 앞에서 선생님은 감정을 섞지 않고, 차분하게 팩트를 꺼냈다.
"어머니, 아이가 수업 시작 10분이 지나서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도 4~5분씩 늦었고요.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 공을 찼어요. 이건 친구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입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왜 즉각적인 지도가 필요했는지 설명했다.
"이건 아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단호하지만 예의 바른 선생님의 태도에, 날이 잔뜩 서 있던 어머님도 결국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민원이 무서웠고, 학부모와의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아이의 잘못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원칙 없는 친절은 방임일 뿐이었다.
만약 그때 체육 선생님마저 침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이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불량품(Lemon)을 품에 안고도, 자신이 괜찮은 시민인 줄 착각하며 사회로 나갔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교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직무 유기였다.
동료를 아프게 했던 것이 악의적인 비난이었다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비겁한 침묵이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정당한 1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악의적인 별점 테러와는 다르다. “위생 장갑을 껴주세요”라는 정중한 요청, “수업 시간에는 타인의 학습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라는 단호한 훈육. 비록 그 순간에는 얼굴을 붉히고 갈등이 생길지라도, 그 불편한 신호들이 모여 빵집의 위생을 바꾸고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한다.
나는 이제 소심한 평화주의자를 그만두려 한다. 그렇다고 동네방네 소리 지르는 진상이 되겠다는 건 아니다. 공개 리뷰 대신 사장님만 알 수 있게 가게 직접 문의를 이용해 위생 문제를 알리고, 교실에서 반복적으로 선을 넘는 아이에게는 민원이 두려워도 단호하게 말해줄 것이다.
“그 행동은 잘못됐어. 하지만 선생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사랑 섞인 별점 1점이다. 내가 주는 이 1점이, 불량품이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길을 잃지 않게 돕는 작은 나침반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망설이는 손가락에 용기를 꾹 눌러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