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의 한계와 우리 아빠의 낡은 택시
중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강당은 꽃다발을 든 가족들과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로 어수선했다. 친구들이 부모님과 팔짱을 끼고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때, 나는 인파를 헤치고 도망치듯 강당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느라 오실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하다가 잠깐 들를까?”라고 물으셨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졸업식 금방 끝나요. 그리고 보통 엄마들이 많이 오시지 아빠들은 잘 안 오실 거예요. 일도 하셔야 하잖아요.”
겉으로는 아버지를 배려하는 예의 바른 존댓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본심은 비겁했다. 사실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회사 택시 로고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낡은 영업용 택시를 몰고 교문 앞에 나타날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졸업식 날 내가 아버지에게 건넨, 비겁한 효도였다.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역사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안아! 벌써 가니? 졸업 축하해. 너 정말 잘 컸다.”
선생님이 건넨 악수의 따뜻함에도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황급히 버스에 올랐다.
당시 뉴스에서는 한국이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느니, 금융위기를 이겨내고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다시 열었다느니 하며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떠들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홀린 듯 인터넷 검색창에 '대한민국 평균 월급'을 쳐보았다.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3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는 통계가 모니터에 떴다.
‘이상하다. 나라는 선진국이라는데, 왜 우리 아빠는 밤새 운전해도 가난할까.’
미터기의 요금은 계속 올라가는데, 매일 회사에 사납금을 채우고 나면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늘 제자리였다. 뉴스 속의 대한민국 경제와 우리 집 식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 사회 교사가 된 지금, 경제 단원을 가르칠 때면 칠판에 큰 글씨로 GDP(국내 총생산)라고 적는다.
“자, GDP는 한 나라 안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합한 것이야.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지. 정말 대단하지 않니?”
아이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필기를 한다.
사회 교과서를 펼치면 GDP의 한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GDP는 국민의 삶의 질 수준을 완벽히 파악하기 어려우며, 소득 분배 수준이나 빈부 격차의 정도를 알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닌다. 나는 밑줄을 그으라고 말하며, 통계학에서 말하는 평균의 함정(Trap of Averages) 개념을 덧붙인다.
“평균의 함정이란 극단적인 값이 전체 평균을 왜곡해서, 대다수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현상을 말해. 예를 들어볼까? 빌 게이츠가 허름한 호프집에 들어오는 순간, 그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의 평균 소득은 순식간에 수억 달러가 돼. 통계적으로는 그 가게 사람들 모두가 억만장자가 된 셈이지. 하지만 빌 게이츠를 뺀 나머지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은 단 1원도 나아지지 않았어. 이게 바로 통계의 착시야.”
내가 근무하는 이곳 충남 아산도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이 있어 1인당 GRDP(지역 내 총생산)가 전국 최상위권인 부자 도시이다. 통계만 보면 이 도시는 활력이 넘치고 풍요롭다. 하지만 평균값이 높다는 건, 그만큼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철저히 소외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려한 통계 그래프는 도시의 명암을 뭉개버리고, 그늘 속에 있는 아이들을 없는 존재처럼 지워버린다.
중학교 1학년, 우리 반이었던 민서(가명)가 그랬다. 민서네는 엄마 혼자서 세 딸을 키우는 한부모 가정이었다. 엄마가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사이, 아이들의 위생은 방치되곤 했다. 민서는 자주 머리를 감지 못해 비듬이 하얗게 앉아 있었고, 이가 썩어 치통을 호소하며 조퇴하곤 했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연결해 주고 위생용품을 쥐여줘도, 바퀴벌레가 나온다는 좁은 방에서 아이들끼리 지내는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민서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간의 무단결석이 이어져 교감 선생님께 보고하고 경찰의 협조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민서 언니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들이 야반도주하듯 연고도 없는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급하게 연락이 닿은 어머니는 “일 때문에 도저히 못 간다”며 전학 수속을 위해 이모를 대신 보내겠다고 했다. 30분 뒤, 교무실에 이모라는 분이 도착했다. 쫓기듯 불안한 눈빛, 낡은 옷차림. 우리는 서류를 안내하며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이모님, 아이들이 전학 가서는 치과 치료도 좀 받고, 위생 관리도 신경 쓸 수 있게 어머님께 꼭 좀 전해주세요.”
내 말을 듣던 이모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언니한테 꼭 전할게요. 언니가 지금 사정이 있어서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사람들을 좀 피해야 해서 경황이 없어요.”
그 안타까운 사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학 처리를 돕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 번호 저장해 줄게.” 하며 건네받은 민서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카톡 알림 창에 민서 언니가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 화면 속 문장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민서야, 엄마 지금 학교에 온다는데 엄마라고 하지 말고 이모라고 하래. 눈치 잘 챙겨.]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눈앞에 앉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저분이, ‘이모’가 아니라 민서의 ‘엄마’였구나.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 시키고, 제 입으로 자신의 흉을 보며 고개를 숙이던 그 여자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딸의 담임 앞에 앉아 있었던 걸까.
나는 모르는 척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럼 이모님.. 어머님께 꼭 좀 전해주세요. 아이들 잘 부탁드린다고요.” 끝내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고, 선생님 앞에서 죄인처럼 도망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교과서 속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GDP는 삶의 질과 빈부 격차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 건조한 문장이, 그날 민서 어머니의 굽은 등 위에서 비명처럼 읽혔다.
가난은 사람을 숨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택시 기사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어 학교에 오지 못하게 했고, 민서의 어머니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들키기 싫어 스스로 이모가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가난을 수치스러워하며 ‘평균’이라는 화려한 무대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가난은 숨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내게는 어린 시절 식탁이 그랬다. 밥상엔 주로 냉동 떡갈비와 소시지가 올라왔다. 나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반찬인 줄 알고 허겁지겁 먹어 치웠고, 덕분에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어른이 되어 사회 교과서를 펴보니,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신선 채소보다 저렴한 고열량 식품 섭취가 늘어 비만율이 높다는 ‘건강 불평등’ 내용이 있었다. 엄마가 차려준 그 밥상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가득한 햄과 소시지는 적은 돈으로 아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가난의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였음을 이제는 안다.
민서가 전학을 간 뒤에도 몇 차례 연락을 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잘 지내라”는 말뿐이라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잊고 있던 카톡 하나가 왔다.
[선생님! 저 오늘 생일이에요! ^^]
울컥 치솟는 감정을 누르며 답장을 보냈다.
[진짜? 민서야, 생일 너무 축하해!!! 잘 지내고 있어?]
학교가 작지만 그래도 좋고 친구들도 착하다는 민서의 씩씩한 답장에, 나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중학교 졸업식 날 밀어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딸 앞에서 이모가 되어야 했던 민서 어머니의 그 참담한 뒷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나의 비겁한 효도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그럼에도 아버지는 왜 묵묵히 핸들을 돌리셨는지. 가난이 우리를 비겁하게 만들었을지라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흘린 그 정직한 땀방울만큼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민서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글을 쓰다 말고, 왈칵 치솟는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식사 하셨어요? 며칠 전에 갈비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나오세요, 제가 살게요.”
“비싼데 무슨 갈비냐. 그냥 집에서 먹지.”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식당에 마주 앉아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갈비를 보았다. 어릴 적 내 밥상에 오르던 차가운 냉동 떡갈비 대신, 육즙이 흐르는 진짜 갈비를 아버지 접시에 올려드렸다. 평생 좁은 택시 안에서 사납금을 채우느라 굳은살이 박인 아버지의 손이 부지런히 쌈을 싸고 계셨다.
전학 간 민서와 그 어머님이, 그리고 이제는 늙어버린 나의 아버지가, 세상이 정해놓은 국가 경제 순위나 평균 소득 같은 커트라인 때문에 스스로를 너무 초라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GDP 그래프가 닿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도, 우리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숯불 연기 사이로 아버지의 환한 웃음이 번졌다.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나의 확실한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