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국립 박물관의 이면
아이누는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성인과는 머리모양이 달랐다. 앞머리와 귀 앞, 뒷머리를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버렸다. 여자아이가 성장하면 어깨정도까지 머리를 길러 양쪽으로 나눴다. 남자아이도 똑같았지만 앞머리를 조금 잘랐다. 이런 형태는 동아시아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변발이나 쵼마게(丁髷)와 닮았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누는 머리를 묶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성인으로써 인정받는 것은 처음으로 사냥에 성공했을 때 성장을 축하하고 앞머리를 자르는 것이다. 이로써 성인과 같은 머리모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입술과 양손에 문신 시누예(sinuye, シヌイェ)를 하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아이누의 시조와도 같은 오키쿠루미의 아내가 병에 걸렸을 때, 불의 신 아페후치카무이에게 낫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불의 신은 나쁜 피를 뽑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오키쿠루미는 아내의 입술을 바늘로 찔러 피를 뽑아 주고, 그 상처 자리엔 불의 신이 만든 재를 발라 주었다. 이후 병도 상처도 씻은 듯 나았으나, 입술 주변이 검게 물든 것이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아이누의 여성들은 입술 주위에 문신을 새기면 병마가 피해 갈 것이라 믿었다. 일종의 주술적 의미인 것이다. 이런 문신을 하는 문화는 세계 곳곳에 있으며, 야마토 민족도 고대에는 문신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이누 여성이 입가에 하는 문신은 미소 짓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나 아이누의 이런 전통적인 문신문화는 메이지 유신에 들어서 정부의 동화정책과 함께 문신이 금지되고, 화인의 차별로 인해 그 문화는 현대에 오면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또한 수렵이나 어로가 금지되며 대대로 이어오던 삶의 방식을 한순간에 잃게 된 아이누 민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다.
[수쿱(sukup, スクㇷ゚), 사람의 일생] (전시실 내 설명 발췌)
■아이누어
옷카이에카치 15(아시크넵 이카시마 완페)파 팍노 포로 코로 이노미 안 히 타 운카스이 와 에카시 푸리 에라만. 맛네카치 아낙네 15파 팍노 코로 시누예 와 후치 푸리 에라만. 오나하 옷카이포호 파카시누. 우누후 메노코포호 파카시누. 카무이투라노 우레시카아시 코로 오카이아시 와 카무이 치에오리팍 쿠스 아푼노 우레시카아시 에아시카이 루웨 네.
집필자: 하야사카 슌, 이시카리(아사히카와) 지역 방언
■한국어
남자아이는 15살 무렵에 의례에 참여하여 남성의 관례를 익힙니다. 여자아이는 15살 무렵에 문신을 하고, 여성으로서의 관례를 익힙니다. 아버지가 남자아이를, 어머니가 여자아이를 가르쳤으며 이 과정에서 문화, 물건, 일 등이 계승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누 사회는 카무이와 함께 살고 카무이를 존경함으로써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전시실에는 꽤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카야노 시게루의 저서 "아이누의 비석"을 봤더라면 말도 안 되는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 어떠한 부연 설명 없이 "아이누 민족이 화인이 경영하는 어장에 일꾼으로 고용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화인이 그들을 정당한 삯을 주고 고용한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마츠마에 번의 아래에 있던 에조치는 "상장지행제商場知行制"라는 제도가 있었다. 본래 번을 다스리는 영주는 가신들에게 지행지知行地라고 하는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지행지에서 농사를 지어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랭한 기후에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에조치는 다른 번들처럼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어 농사로는 부를 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마츠마에 번은 무역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이누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해안선을 따라 교역소 아키나이바商場를 설치했다. 그리고 가신들에게 그 교역소를 하사해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가신들은 교역해 얻은 물품을 혼슈本州의 상인들과 거래하며 이익을 챙겼다.
상인들이 에조치로 진출하면서 가신들은 교역소를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대신, 수수료를 받고 그 권한을 상인들에게 맡기게 된다. 상인의 진출에 따라 교역소는 점점 어업 생산의 공간으로서 바뀌고, 권한을 대리로 맡기는 "장소청부제場所請負制"가 자리 잡게 된다. 이로 인해 18세기 초반에는 상인이 교역권을 거의 독점하게 된다.
상인들은 이익을 불리기 위해 아이누 민족을 노동력으로 확보했다. 그들은 칼을 내세워 아이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린아이나 여자 할것없이 일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일꾼으로 잡아들였다. 강제 징용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이누는 화인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삯을 받으며 화인의 어장에서 노예처럼 착취당했다.
또한 두 번째 충격은 일제시절 일본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이야기였다. 아이누 민족이 같은 일제 지배하에 있었던 류큐인, 조선인, 대만 소수민족과 같이 마치 우리 안 동물처럼 산 채로 전시된 것을 "아이누 민족도 만국박람회에 참가했었다"는 식으로 어떤 비판 없이 간결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다. 이 같은 설명은 같은 피지배 민족으로써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었다.
이렇게 씁쓸하게 아이누 문화에 대한 전시가 끝나고, 다른 세계 선주민족의 공예품 등도 작게 전시돼 있었다. 예로부터 아이누가 다양한 민족과 교역하고 교류한 것처럼, 그들은 지구촌 시대인 만큼 더 나아가 세계 각지의 선주민족, 혹은 마이너리티와의 유대를 쌓아가고 있었다.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니브흐의 가죽 가방, 사미의 자작나무 식기, 마오리의 가방, 하이다의 목제품, 파이완의 주기(酒器)가 되겠다. 저마다 독특한 미를 가지고 있다.
또 내가 갔을 땐 특별전 "아칸토 운 코탄(akan-to un kotan)"을 하고 있었다. 아칸 호(阿寒湖)의 아이누 코탄을 비롯해, 홋카이도 도동 지방의 쿠시로(釧路) 쪽에 사는 아이누에 대한 이야기가 전시돼 있었다. 이 지방의 역사를 설명하는 글을 인용하면 이렇다.
"19세기 중반 홋카이도와 사할린을 답사한 마츠우라 타케시로의 <쿠스리 일지(久摺日誌)>에는 시타카라 강과 아칸 강을 따라 아이누의 집이 여러 채씩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메이지 정부에 의해 농업이 권장되자 화인(和人)의 이주가 진행되어 아이누의 생활은 크게 변해갑니다. 1908년에 아칸 호반에 최초로 여관이 개업하고, 1934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전후(戰後)의 홋카이도 관광 붐 무렵에는 각지에서 아이누가 이주해 와서 현재의 아칸호 아이누코탄이 형성되었습니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아칸 호반의 아이누 문화를 이러한 경위를 배경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2023.04.05 가다
2023.04.20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