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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읓 May 12. 2023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 (17)

홋카이도립 아이누 총합 센터

거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 있는 출국을 앞둔 전날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이었지만 꽤 여러 곳을 답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에 약간 태만해진 걸까? 욕심을 부려 삿포로에서는 하루에 두 곳은 견학할 계획이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나섰으면 가능했을 걸 숙소에서 너무 천천히 나선 것이다. 이날은 결국 한 군데밖에 못 갔다. 


삿포로까지 왔으니 빠트리지 않고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시내에 있는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를 견학하는 것이다. 그곳은 협회의 사무실과 함께 아이누 총합 센터라고 소소한 전시실과 자료실이 조성돼 있었다. 도민활동센터인 카데루 2·7 빌딩 7층에 있는 아이누 협회는 여태 갔던 곳 중에 접근성이 가장 뛰어났다. 또 지도를 보니 이 근처엔 삿포로의 유명 관광지인 적벽돌의 구 홋카이도 청사가 있었는데, 정비 기간이라서 볼 수는 없었다.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는 동포를 뜻하는 아이누어인 "우타리 협회"란 명칭으로 개칭했을 때가 있었다. 과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조센징朝鮮人"같은 멸칭으로 부른 것처럼 아이누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본어로 개를 뜻하는 단어가 이누(犬)였기 때문에 아이누를 "아, 이누(아, 개다)"같은 모멸적인 말로 차별했다. 


아이누가 비하하는 의미가 돼버렸기 때문에 협회의 이름도 그처럼 바꿨지만, 2009년에 다시 설립당시의 이름인 "아이누 협회"로 바꾸었다.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단어를 다시 되찾을 수 있어서 다행인 것 같다. 

홋카이도립 아이누 총합센터 자료전시실

■관람료

무료

■개관시간

오전 09:00~오후 17:00 

■휴관일

일요일·명절·연말연시(12.29~1.3)

전시실에서는 근대에 들어 선주민족인 아이누가 화인에 의해 구 토인으로 명명되고 그로써 받은 차별, 억압에 대한 고발과 함께 이 협회를 결성하게 된 배경을 알리고 있었다.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급여지의 개요 (전시실 내 설명 번역)

1899년(메이지 32년) 3월 2일, 농경민화와 동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 법률의 제1조로는 "홋카이도 구 토인으로써 농업에 종사하는 자, 또는 종사하길 원하는 자에게는 한 가구당 부지 만 오천 평 이내에 한해 무상 하부할 수 있다."라고 정해져 있었는데, 농경에 종사하는 아이누에게 급여된 토지는 화인에게 양호한 토지를 분양한 뒤의 나머지였고 그 대부분은 습지나 경사지 따위로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또한 면적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3조에는 급여된 토지를 15년간 개간하지 않았을 때에는 몰수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농지 개혁에 있어서도 급여지의 대부분이 손실되었습니다. 


■근세의 개요

15세기의 절반쯤부터 아이누와 화인의 교역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에조치의 해산물 등 천연자원은 화인에게 큰 이익을 안겼고, 번이나 막부가 경영하는 교역소가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이누는 화인에게 참을 수 없는 수탈과 억압을 맞고, 몇 번의 항쟁도 일으켰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메이지 정부에 들어 처음엔 평민으로써 일본에 편입되었지만 나중에 "구 토인"으로 자리매기게 됩니다. 

전시돼 있는 "치토세 아이누 욱명사"의 기. 그리고 아이누 협회의 다양한 활동사진이 촬영되어 있다.

■사단법인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의 발자취 (전시실 내 설명 번역)

1930년(쇼와 5년), 치토세 아이누 욱명사(旭明社)를 기반으로, 삿포로시에 전국의 아이누 대표자가 모여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격화에 의해 그 활동은 상실되었습니다. 

1946년(쇼와 2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주주의의 태동과 함께 자주적으로 아이누 유지의 부름에 따라 히다카(日高) 지역의 시즈나이 쵸(静内町)에서 민족의 사회적, 경제적인 발전이나 복리후생을 활동의 목적으로 "사단법인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몇 년 후부터 활동이 정체되었습니다. 

1960년(쇼와 35년), 삿포로시에서 재건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당시 "아이누"란 단어가 차별적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 1961년에 "사단법인 홋카이도 우타리협회"란 명칭으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타리협회는 2009년에 다시 아이누협회로 개칭되었다.)


■협회의 목적과 활동

여러 아이누 민족 단체 중에서 최대의 회원수를 보유하고, 민족의 존엄을 확립하기 위해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 문화의 보존·전승 및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각종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누 사람들의 민족의식의 고조 (전시실 내 설명 번역)

동화정책이 진행되고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아이누는 스스로 전통문화를 기록·학습·전승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리고 아이누 민족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한 움직임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자기 각성이나 아이누 민족의 결속, 사회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언론활동 조직화의 움직임도 활발히 해 왔습니다. 


전시관 안에는 아이누 말과 구비서사시 유카라를 기록하고, 사회운동가로써 아이누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쓴 인물들이 당시 써냈던 서적들이 전시돼 있었다. 


아이누어 연구자였던 치리 마시호知里真志保(1909~1961)

아이누 구비전승 유카라를 기록으로 남긴 치리 유키에知里幸恵(1903~1922)

선교사이자 유카라를 기록으로 남긴 칸나리 마츠金成マツ(1875~1961)

와카和歌(일본의 정형시가)작가이자 아이누 사회운동가였던 이보시 호쿠토 違星北斗(1901~1929)

시인이자 기독교 전도자였던 바첼러 야에코バチェラー八重子(1884~1962) 

홋카이도 아이누의 공예품

홋카이도 아이누의 공예품을 비롯해 사할린, 쿠릴 열도 아이누의 공예품도 전시돼 있었다. 저마다 약간의 분위기가 달랐다. 그중 사할린 쪽의 아이누는 특별히 인근에 이웃한 북방민족들의 문양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2023.04.07 가다 

2023.04.30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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