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11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실록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

제 11 권 [폭군 연산 1500~1515]


주지육림에 빠진 연산군은 백모인 월산대군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를 범한 이후 그의 패륜은 극에 달해서 외명부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그중 마음에 드는 부인을 끌어들이는 일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었다. 후원 경치 좋은 곳에는 탕춘대(蕩春臺)를 짓고, 삼각산 밑에는 탕춘정을 지어서 연일 주연과 향락 속에서 정무는 뒷전이었다. 특히 성종의 후궁 소생 휘숙옹주의 부마인 풍원위 임숭재는 연산군의 음욕을 더욱 부채질하는데, 연산군은 그의 집을 가는 길이 번거롭다하여 대궐 북쪽으로 흐르는 옥류천의 동쪽 담을 허물고 곧장 길을 내도록 명하기까지 한다.

대궐이 이러하니 정치 질서는 문란해지며 탐관오리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는데 그 중에서 연산군 6년에 일어 난 홍길동의 난이 가장 규모가 컸다.

홍길동의 본채는 경상과 충청을 잇는 관문인 새재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충청의 괴산과 연풍, 경상의 문경을 중심으로 충청 일대로 진격하기 쉬운 포진이었고 경상도로부터 올라오는 공물도 가로채기 쉬운 터라, 장차는 도성까지 쉽사리 진출할 형세가 되어 있었다.

병조판서 이계동에 의하여 천신만고 끝에 진압되는데,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의적 홍길동(洪吉同)을 배경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류계에서 임숭재(임사홍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매부)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 제안대군인데 이는 예종의 맏아들로서 예종이 승하할 때 나이가 너무 어려 왕위가 사촌 형인 자산군(성종)에게로 돌아갔던 인물이다. 한 미모의 기생을 두고 둘이서 경합을 벌이기도 하는데 임숭재가 주막에 위탁했던 것을 제안대군이 가로 채서 소실로 삼는다. 그러다가 임숭재는 자기가 원주인이라며 찾아오고, 제안대군은 조카인 연산군을 통하여 다시 뺏어오는 광경이 재연되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장녹수라는 여인이다.

연산군은 백모인 승평부부인 박씨를 범한 이후 제안대군의 집에서 주연을 갖기로 하는 날, 이를 승평부부인 박씨가 극구 말리는 대목이 나온다. 왜냐하면 비록 제안대군이 첫 번째 부인 김씨와 다시 결합하여 살고 있지만, 제안대군의 2번째 부인이 바로 자신의 친동생 박씨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연산군에게는 누가되든 숙모가 되는 것이다. 내당부인 김씨는 연산군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어 자신을 대신해서 장녹수에게 시중들 것을 요구하고, 장녹수는 오히려 이를 일생일대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한다.

장녹수는 아이까지 출산한 30대 여인이었으나 10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20대 초반의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어머니와 같은 모정을 느꼈다고 한다.

장녹수는 자신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연산군을 이용하여 신분상 면천을 받는 것은 물론 온갖 특혜와 비리로 재산을 축적해 나간다.

<<연산군 일기>>에 나오는 대목은 아래와 같다.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 대군의 가노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창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 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그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좇았고, 숙원으로 봉했다. 얼굴은 중인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재물을 기우려 모두 그 집으로 보내었고, 노비, 전답, 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 김효손은 그의 형부이므로 현달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궁중의 뇌물 사건은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성총을 깡그리 앗아낸 악녀일 수밖에 없었다.


장녹수가 연산군의 상투를 쥐고 흔드는 형국이 되고 보니 가장 난감한 것이 연산군의 매부가 되는 임숭재였다. 그는 자신이 희롱하던 장녹수를 제안대군에게 헌 신짝처럼 넘기면서 그녀로부터 받은 저주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임사홍과 고민 끝에 장녹수에 관한 일은 어떡하든 자신이 해결해야할 사항이고, 임사홍에게는 유자광의 말처럼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를 각별히 대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악연이 있는 장녹수의 말 한 마디면 그들의 목숨이 어찌될 것인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임사홍과 유자광은 전형적인 간신배로서 자신의 생존과 영달을 위해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일을 연계 고리로 삼아 연산군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한편 장녹수에게 비굴할 정도의 아첨으로 자신의 입지를 조금씩 넓혀 나간다.


승평부부인 박씨, 장녹수 뿐만 아니라 연산군이 중신의 처를 범했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서 나온다. 연산군의 패륜은 극에 달하는데, 당하는 쪽에서는 차마 소문이 날까 두려워서, 이를 지켜보는 쪽에서는 연산군의 보복이 두려워서 각각 입을 열지 못했으며 3정승 6판서가 모여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는 “지당하옵니다”라는 말밖에 없었기에 특히 영의정 유순을 ‘지당대감’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아주 오래 전 예스맨yesman을 지당대감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를 보았는데 당시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연산군은 시 짓기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악공을 광희(廣熙)라 하고, 기녀를 운평(運平)이라 하고 그 중에서 빼어난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했으며, 임금을 가까이서 모신 흥청을 지과(地科)흥청이라 하고, 임금과 동침한 흥청을 천과(天科)흥청이라 했다. 연산군의 문재가 엉뚱한 곳에서 발휘가 된 셈이다. 여기에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연산군의 정신 상태는 점점 이상 징후를 보여 하루는 주연 자리에서 흥청 하나를 지목하여 승지들이 다 보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과 교합할 것을 주문한다. 그때 판내시부사 김처선은 내시의 신분으로 연산군에게 황음한 짓을 삼갈 것을 소리친다. 화가 난 연산군은 활을 쏘아 김처선의 다리를 맞추고 그래도 김처선이 고언을 멈추지 않자 칼로 김처선의 입을 찢어 혀를 잘라낸다. 그것도 모자라 배를 찔러 창자를 끄집어내는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서 내린 어명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조정과 민가에서는 처(處 )자를 쓰지 못할 것이니라!”였다. 처 자字가 든 이름을 가진 백성들은 서둘러 다른 이름으로 고쳐야 했고, ‘처용무’가 ‘풍두무豐頭舞’로 바뀐 것도 처 자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김처선, 그는 환관이었지만 그가 보인 충절은 당대를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지당대감들에게 큰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연산군의 자폐적 증세는 날로 심해져서 급기야 도성을 중심으로 사방 100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출입을 못하게 하고 그 곳에서 연병과 사냥을 하고자 했다.

그 지역을 보면,

동쪽으로는 한간 삼전도, 광진, 묘적산, 천마산까지 약 70리,

서쪽으로는 파주 보곡현가지 60리

남쪽으로는 한강 노량진, 용산, 양화도까지 10리 한계

북쪽으로는 석점, 홍복산까지 65리 한계.

도성만 나서면 광활한 천지가 연산군만의 원시림이 되는 것이었다.


연산군의 황음한 행동이 절정에 달하는 즈음, 민심은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고 금표로 인해 살던 곳에서 쫓겨난 백성들을 비롯하여 전국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로 가득했다.

이런 와중에 월산대군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약을 먹고 자결을 한다. 연산군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모가 조카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친동생 평성군 박원종을 외직으로 내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외직으로 쫓겨날 지경에 있었던 박원종은 도성에 남게 되었고, 승평부부인 박씨의 자결로 인해 충격을 받은 박원종은 부사용 성희안, 이조찬서 유순정과 그간 암암리에 모의했던 연산군의 축출 역모를 실행에 옮긴다.

그들은 사전에 모의한 바대로 성종의 두 번째 중전 윤씨(자순대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옹립하고자 하는데, 이가 바로 19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중종이 되며 이를 중종반정이라 부른다.

연산군으로부터 옥새를 뺏은 박원종, 성희안 일행은 진성대군을 경복궁으로 옮겨 놓은 후,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보내고, 장녹수를 비롯한 전전비, 김귀비 등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후궁들을 하나씩 끌어와 참형에 처한다. 또한 연산군에 아첨하며 권세를 누리던 자들을 모두 처형하기에 이른다. 그 중에서 좌의정을 지냈던 신수근이 문제가 되는데, 신수근은 자신의 누이가 연산군의 중전이고, 자신의 딸이 바로 중종의 부인이기에 신수근의 처형 후, 중전 신씨에 대한 처리가 까다로운 사안으로 대두된다. 세종대왕의 중전 심씨의 경우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중전 신씨는 하루 아침에 부부인府夫人에서 국모의 지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신수근의 처형으로 어찌될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중전 신씨는 새로 정권을 탈취한 중신들에 의하여 폐비가 된다. 당시 중종은 신씨와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하는데, 임금이 됨에 따라 아내를 버려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폐비가 된 신씨는 인왕산 자락 아래에 있는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궁에서 고개를 들어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 두어 애달픈 마음을 전했다고 하며 치마색이 변할 때면 자신이 그곳을 다녀갔다는 표식으로 삼았다. 후에 이를 치마 바위라고 부른다.


한편 반정 세력은 왕위 계승을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고자 했으나, 명나라는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것까지는 알겠으나, 어찌하여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지 않고 진성대군이 이어받았는가를 상세히 밝히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이에 연산군의 후손들에게 사약을 내리고 명나라에는 병사한 것으로 거짓 보고를 하게 된다.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연산군은 이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하다가 역질에 걸려 31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중심으로 한 반정 세력은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주요 인물들의 친척들을 마구잡이로 넣게 되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자들이 공신의 자격을 부여 받는 비리가 속출하게 된다.

그 중에서 노와공신(怒臥功臣:화내며 드러누워 따낸 공신 자리)이라 놀림을 받은 신수린이란 자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상기 성희안의 여동생인데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편 신수린에게 한 자리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한다. 성희안은 신수린의 인간됨을 딱히 좋아 하지 않았으나 노모가 자리에 누워 단식을 하는 통에 제부인 신수린을 4등 공신으로 천거하기에 이른다. 이런 유의 공신들이 수 없이 많았고 후에 조정 내부에 사단이 벌어지는 단초가 된다.

신수린은 어느 날 아내가 불공을 드리고자 집을 비운 사이 시녀인 반녀니(얼굴이 매우 작고 볼에 보조개가 팬 미인인데 별명으로 부른 이름이라 함)를 유혹하여 일을 저지른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성희안의 동생인 아내에게 적발을 당하게 된다. 아내 성씨는 분을 못 참고 어떻게 복수를 할까 고민을 한다. 성씨는 어느 날 신수린의 아침상을 직접 마련하여 가져가는데, 밥그릇을 열어 본 신수린은 반녀니의 손목이 피투성이인 채로 담겨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한다. 결과적으로 신씨는 살해죄로 장형 80대를 맞고 방면이 된다. 한나라 여태후가 후궁인 척부인의 팔 다리를 잘라 인간 돼지로 만들어 돼지 우리에 넣은 것이 연상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반정 세력은 박원종 영의정, 유순정 좌의정, 성희안 우의정으로 구성된 조정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이 국정 운영에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특히 박원종은 자신의 병이 깊어감에 나라의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리는데, 이는 자신이 맡고 있는 영의정 자리를 후임이 될 유순정에게 넘기지 않고 경륜이 있는 김수동에게 넘기고자 한다. 더불어, 연산군 때 막혔던 언로를 회복해야 한다는 절대 신념으로 대간들이 자신을 향한 비난을 쏟아낼 때도 묵묵히 침묵으로 일관한다. 구국의 결단일 수도 있었다.

노성한 인재를 재 등용하고 언로를 확장한 박원종의 정책은 사분오열될 뻔한 조정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510년(중종 5년) 박원종은 44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박원종의 죽음은 중종에게 있어 큰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어느덧 왕위에 오른 지 5년. 중종은 훈구 세력에 얹혀 있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홀로서기를 위한 방안을 강구한다.

그것은 새로운 인재의 발굴과 함께 연산군 때 귀양 간 사람들 중에서 쓸 만한 인물을 물색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전개될 조광조의 시대는 박원종이 열어 놓은 언로 개방이라는 밑거름과 중종의 시대적 필요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P/S

중종은 신씨의 폐비 이후, 윤씨를 중전으로 새로이 맞게 되고, 박원종의 친척 경빈 박씨와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를 후궁으로 맞는다. 중전 윤씨는 아기씨를 생산하지만, 출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는 후궁들에 있어 그들이 중전의 자리는 차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면 대비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내명부의 또 다른 암투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 조선왕조실록 1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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