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12권 -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12 권 [조광조의 죽음]
반정 세력에 의하여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금실이 좋았던 신씨 부인과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되었고, 공신 세력의 조정에 따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 회의를 느낀다. 그렇다고 자기 맘대로 왕위를 걷어 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에 대항하고자 신진사림 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갖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 대표주자가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김종직(제10권에 나오는 조의제문 작성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관직에 나와 성리학을 통한 도학 정치를 꿈꾸며 6살 연하인 중종과 군신의 관계라기보다 마치 형제지간마냥 의기투합하여 개혁 정치를 이끈 인물이다.
그가 시도한 대표적인 정책은 현량과(賢良科)의 도입이었는데, 현량과란 기존의 사장(詞章) 중심의 인재 선발 방식으로는 참다운 인재를 선발이 불가능하니 천거로 재능과 학식, 성품을 갖춘 인재를 모집하고, 이들을 군주가 직접 면접을 한 후,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하자는 정책이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이 약한 중종으로서는 이 같은 방법으로 신진 사류들을 기용하고자 했다.
또 다른 조광조의 개혁은 소격서(昭格署)의 철폐였다. 소격서란 고려 때부터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던 정소를 말하는데, 조광조는 비이성적이며, 민간에게는 무속 신앙으로 이어져 비방 책이 난무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됨을 들어 전격적인 철폐를 주장한다. 소격서 철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이라 중종은 물론 대비, 왕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치지만,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동원하여 힘으로 중종의 가납을 이끌어낸다.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도학 정치는 모든 백성들을 도덕군자로 만들고 심지어 군자는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과격하고도 급진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는데, 이는 중종으로 하여금 서서히 환멸을 느끼게 만들어 간다. 특히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경연은 중종의 심신을 탈진 상태로 끌고 가기도 하고, 조광조의 지칠 줄 모르는 개혁의 의지는 주변 사람들의 피로 도를 더해 가가기만 한다.
이러한 때에 신진사류들은 엄청난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다.
바로 ‘정국공신들의 훈작을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정국공신이란 연산군을 밀어내고 중종을 옹립한 반정공신들을 말한다.
제 11권에서 언급된 바 있는 노와공신(怒臥功臣)의 예처럼 부정적 방법으로 공신 대우를 받고 있는 약 80 명의 공신들에 대한 훈작을 취소하라는 외침이었다. 이는 서서히 끓어오르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에 불을 붙이는 사태로 이어진다.
이러한 때에 공신 세력이자 훈구파를 대표하는 남곤, 심정, 홍경주(희빈 홍씨의 아버지)는 중종이 총애하는 후궁인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통하여 밀실 정치를 꾸미고자 도모한다.
특히 지낭(智囊: 꾀주머니)이라 통하는 심정이 모사를 꾸미는데, 소위 말하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기획한다. 심정은 홍경주를 통하여 희빈 홍씨에게 동산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쓰게 한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 먹게 만들고, 이를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이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초위왕의 주초走肖는 조(趙)자의 파자로서 조광조를 의미하는 미신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공신들에 대한 훈작 삭제는 정당성의 문제라기보다 중종에게 있어 보다 심각한 문제로 야기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사림파가 훈구파를 제거하고 득세를 하게 되면 공신 세력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자신은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광조의 성격이라면 자신을 폐위하고자 덤벼들 수도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만큼 조광조의 현량과 실시는 그의 주변에 많은 인물을 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특히 백성들에 있어 조광조의 청렴함과 초지일관의 정신은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마침내 중종은 홍경주에게 밀서를 보내어 조광조의 제거를 종용한다.
사림 세력들이 훈작 삭제를 외치는 통에 자연스레 단합된 훈구파들은 남곤, 심정, 홍경주를 중심으로 하고, 중종의 밀서를 바탕으로 사림파에 대한 제거 작업에 들어간다. 주초위왕이란 자작극을 마치 조광조의 역모인양 꾸며 그를 따르는 사림 주요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부른다. 그리고 기묘사화에서 살아난 사림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고변을 통하여 잔당을 제거하는 사건이 이어지는데, 이를 신사무옥이라고 한다.
조광조의 도학정치는 삼강오륜에 기초하고 있는데, 성리학을 통한 현실 정치 참여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조광조는 인종 때에 이르러 직첩을 도로 받았고, 선조 초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중종은 3번의 결혼을 하는데, 첫 번째 부인이 연산군의 측근이었던 신수근의 딸 신씨였다. 반정 세력에 의하여 신씨는 궁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고, 두 번째 부인이자 첫 중전이 윤씨이다. 중전 윤씨는 공주와 원자를 생산하지만, 원자 이호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일주 일만에 세상을 떠난다. 후에 공주의 시아버지가 되는 김안로, 원자 이호가 세자로 책봉되자 외숙인 윤임 등이 세자파로 구분되면서 정권의 실세가 된다. 3번째 부인이자 2번째 중전의 자리 또한 윤씨인데, 중전 윤씨는 공주만 내리 셋을 낳고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입장이었다(2번째 중전 윤씨가 후에 문정왕후가 된다).
중종은 후궁 중에서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총애하는데, 경빈 박씨는 반정 세력의 거두였던 박원종의 척신이며, 왕실에서 맨 먼저 태어난 왕자 복성군을 출산해 두고 있었다. 희빈 홍씨는 홍경주의 딸로서 그녀 역시 금원군을 생산해 두고 있었다. 반정 세력이자 공신인 남곤, 심정, 홍경주가 주축이 되는 공신파가 상기 세자파와 대립을 하게 되며, 조광조의 죽음 이후 신진사림파는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지만, 그들이 성균관을 비롯한 국정 운영의 Brain임은 부인할 수 없는 위치를 나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세자파, 공신파, 사림파로 나눠진 조정은 특히 중종 때에 서로 간의 모함과 고변 등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상기 경빈 박씨는 연산군 시절 흥청으로 선발되어 궁궐 생활을 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고, 요염함도 있어 중종이 가장 아끼는 후궁으로 자리 잡는다. 박원종과의 연계로 공신파 인물들과 교류를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통하여 중전은 못될지라도 대비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남곤과 심정이 세자파의 거두 김안로를 뒷조사하여 그의 비리(국가 소유의 목장을 사유화, 매관매직, 뇌물 등)를 탄핵하였을 때, 중종이 사돈 관계인 김안로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있음에 경빈 박씨는 소위 베갯머리송사로 김안로를 귀양 보내는데 성공한다.
다른 한편으로, 중종의 2번째 중전 윤씨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는 중전 윤씨의 의도된 계획이 아닌 서로 다른 이해 관계자들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구성원은 바로 중전 윤씨의 친동생 윤원형, 도총관 소실의 딸 정난정, 봉은사의 보우 스님, 산골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임백령과 그의 정인이자 기생인 옥매향 등이 그들이다.
동 세력의 큰 줄기는 두 갈래이다.
하나는 중전 윤씨가 공주만 내리 셋을 낳고 아들이 없던 와중에 친동생 윤원형으로부터 봉은사의 보우 스님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솔깃해한다.
윤원형 또한 슬하에 자식이 없던 차에 부인 김씨가 보우 스님을 언급하기에 비록 숭유억불이라는 국가 정책에 어긋나지만 봉은사에 득남불공을 드려볼 것을 허락한 바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득남이 보다 시급한 것은 바로 누님이자 중전으로 있는 윤씨에게 더욱 절실한 상황이고, 중전이 득남을 해야 자신의 출세 길도 훤히 뚫릴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 다른 줄기는 바로 도총관 소실의 딸인 정난정이다.
정난정은 조선 역사상 가장 대가 센 여성 인권운동가(?)라 해도 지나침이 없는 인물인데 양반일지라도 소실의 딸로서 서얼이 가지는 신분적 한계에 몸으로 부딪히며 삶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재색을 고루 갖춘 여인으로서, 당시에는 소실의 딸이 넘볼 수 없는 정승의 정실로 살아가겠노라는 의지를 어릴 적부터 간직하며 꿈을 좇는다. 정난정이 혼기에 들어서자 아버지 정윤겸은 내로라하는 집안의 소실로 혼사를 맺고자 하는데, 집에 찾아온 매파에게 남긴 시 한 수는 그녀의 당돌한 의지를 대신하며, 곧 장안의 화제가 된다.
소실의 딸로 태어난 것이 절세의 한이 되어
간장이 끊어지듯 서러워라
명가의 며느리요, 정경부인이라
혼담 가져온 사람을 크게 웃어 조롱하네
정난정은 보우스님의 설법으로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나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번번이 부딪힌다. 비구니가 될까 생각도 했다가, 소실로 들어앉는 혼사를 맺느니 천하의 명기가 되어 온 남성을 우롱하며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도성의 유명한 기생을 알아보다 옥매향을 불현 듯 찾아가기로 한다.
옥매향은 연산군 때 평양에서 뽑혀 올라온 어느 기생의 딸이라고 한다. 얼굴은 어미를 빼어 박아 이슬을 모금은 연꽃 같았고, 몸매 또한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워 사내들이 간장을 녹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노래와 거문고 솜씨도 일품이었고, 난초 치는 솜씨 또한 능숙했으며, 비록 한양에서 자라다시피 했지만, 그 성품과 말씨와 용태에서 평양 여자들의 냄새와 맛이 풍기고 있어 평양 기생을 찾듯 옥매향을 찾았다.
옥매향은 조정에서 과거 시험 등과자들을 위해 마련한 연회에서 시골 출신으로 급제를 한 임백령의 반듯한 외모와 출중한 그의 실력에 미래를 걸 듯,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정인情人으로서의 연분을 쌓고자 한다. 그리고 기생이지만 임백령에 대한 지조를 끝까지 지킨다.
보우는 금강산에서 득도를 한 봉은사의 고명한 스님으로서, 세상사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었으며, 우연히 연이 닿게 된 윤원형과 정난정과의 인연이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파악하고, 왕실을 통한 불교의 중흥을 도모할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아내 김씨를 통하여 보우를 만나본 윤원형은 보우가 예사 스님이 아닌 것을 알고, 그의 영험한 불공으로 중전의 득남을 기도하고자 한다. 중전 윤씨 또한 윤원형의 진정어린 설득에 보우 스님을 통한 득남불공을 의뢰하고자 마음먹는다.
마침내 윤원형은 남의 눈을 피해 보우스님을 변장시킨 채로 궁궐로 잠입하였으며, 중전과의 회동이 이루어진다.
우연의 일치인지 중전이 득남불공을 의뢰한 후부터 중종이 중전 윤씨를 찾는 발길이 부쩍 잦아졌으며, 그 와중에 중전은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지만 공주가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보우 스님의 불공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에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된다.
보우는 또한 그들에게 10년 대계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중전을 달랜다. 그 이유는 이번 출산이 공주가 아니라 왕자였다면, 왕위 계승에 있어 죽은 중전 윤씨의 아들 이호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는 상태에서 주위 세력으로부터 견제만 받기에 시기적으로 좀 더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윤원형은 궁궐로 잠입할 때 우연히 마주친 임백령을 찾아가 그의 입막음과 동시에 세자와 중전 중 어느 줄에 설지 결단을 종용한다. 조정에 아무런 연줄이 없는 탓에 정치적 미래 없이 반복된 생활만 하고 있던 임백령은 오히려 윤원형의 접근을 내심 반기며 힘을 더할 것을 약조한다.
이렇게 해서 세자파와 공신파의 양대 세력 사이를 비집고 중전 윤씨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정난정의 신분 상승을 위한 질주는 어디까지 진행될지 주목된다.
*P/S
정난정을 검색하다가 접한 재밌는 컬럼이 있어 인용하고자 한다.
대한심신치의학회 최용현부회장이 치과신문에 기고한 내용이다.
“ 황진이, 정난정, 신사임당이 조선시대 유명한 여성들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 세 여인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구글 위키백과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1551년(명종 6)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으로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였다. 황진이는 (대략 1506년~1567년)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였다. 정난정은(1506~1560) 윤원형을 사주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모자로 첩이며, 명종조의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세 여성은 2~3년 차이로 탄생했다. 당시는 조선 중기 가장 혼란한 시대였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해는 연산군 10년으로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가 있었다. 사회는 이미 6년 전에 발생한 무오사화를 겪었으며 더욱 혼란한 상태가 되었다. 15세가 되던 때에는 중종반정 이후 혁신세력인 조광조가 몰락하는 기묘사화를 겪게 된다. 돌아가시기 6년 전에는 을사사화를 겪는다. 이 세 여인은 연산군을 지나 중종반정을 거치고 다시 명종 때 윤원형과 정난정의 을사사화를 모두 겪었다.
백성들 삶은 피폐하여 임꺽정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다. 이런 혼란기에 세 여인의 유명세는 필연적이었다.
부러움의 대상은 신사임당이다. 그녀 사망 후 유산 상속 시에 노비가 100여명이었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강원도 최고의 부자이며 고려부터 귀족인 평산 신씨 후손으로 부와 귀를 모두 지닌 집안의 최고 재녀였다. 당시 그림공부를 위해 안견의 그림을 사줄 정도였으니 지금으로 생각하면 장관 집에 준재벌급 정도였다.
황진이는 미모와 춤과 재기로 혼란기 암울한 선비의 삶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생각된다. 신사임당은 그림과 시와 부와 명예를 모두 지니고 아들까지 잘난 완벽한 삶을 지닌 여성으로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으로써 희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난정은 미모와 자신의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살아있는 핵심 권력으로 모두의 질투와 비난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태어난 퇴계 이황 역시 혼란하고 살벌한 시기에 최고 유학자가 될 숙명이었다. 이이는 신사임당의 엄친아로 4대 사화가 끝난 뒤를 이어받아 유학을 높이고 최고 제자인 송시열을 배출하였으니 부와 명예 그리고 시기까지 잘 태어났고 제자까지 잘 둔 최고의 행운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발생한 중종반정은 필연적으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우리 사회 역시 최대 혼란기를 겪고 있다. 최순실 사태로 시작된 대통령 탄핵은 반정 아닌 반정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반정 후에는 반드시 세력 간에 내홍을 겪는 것은 역사적으로 필연성이다.
필연적 혼란은 이황이나 이이와 같은 대단한 학문적이고 정신적인 성과를 이루기도 하지만, 의적 임꺽정과 윤원형, 정난정 같은 인물도 탄생시킨다. 과연 누가 어떤 자였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기에 이름난 자는 최대한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것이지만 모르는 이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다만 지켜보는 서민들 마음은 지금이나 당시 백성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제 12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