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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25. 2023

조선왕조 500년 제 23 권 [명성 황후] 하

한편, 일본의 사정은 1854년 미국의 군사 압력에 굴복하여 가나가와조약으로 개항을 한 후, 서양문물의 도입에 미온적 반응을 보이던 도쿠가와 막부가 사카모토 료마를 주축으로 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세력에 굴복하여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 : 막부의 통치 권력을 왕실로 돌려준다는 뜻)을 하게 된다. 이로부터 존왕양이 세력은 양이에서 개화로 눈을 돌려 본격적인 서구 현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소위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다.

급속한 현대화는 일본 군사력의 팽창을 가져왔고, 1870대 들어서면서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대정봉환이전부터 일본의 번국(蕃國: 다이묘에 의하여 통치되던 봉건적 자치국가)들은 막부의 눈을 피해 서양(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현대식 무기와 군함, 군사 체계를 도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를 강화도로 보내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한다. 그리고 1876년 초 조선에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자 군함 5척을 동원하여 조선 조정을 재차 압박한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전권대신(판중추부사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조선 ᆞ일본 양국 사이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조인하게 되었다. 조선으로서는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 된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1876년은 대원군이 1873년 실권하여 거의 금족령에 준하는 상태에 있을 시기였기에 그나마 개항을 위한 조약이 체결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당시 조선 국내 정치로 돌아오면, 경복궁 중건에 따른 재정의 탕진은 국가 운영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백성들의 세금에 의존하는 국가가 엄한 곳에 돈을 쓰고 정작 써야할 곳에 예산이 없으니 더욱 더 백성을 쥐어짜게 만든다. 게다가 어설픈 화폐 발행 등으로 국가 경제는 더욱 수렁으로 빠진 상황이 되어 버렸고, 10년간 이어진 대원군의 만기친람에 따른 정책의 부작용으로 전국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1873년 어느덧 22세의 나이에 이른 고종은 중전 민비의 간언에 따라,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선언하기에 이르고, 유림 사이에 명망이 높은 최익현의 탄핵 상소는 흥선 대원군을 하루아침에 실각하게 만드는데, 고종으로서는 대원군이 내세우는 양이, 보국(쇄국)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친정 체제를 선포한 고종은 의정부의 개편을 단행하는데, 개항의 필요성을 누누이 주장해오던 박규수를 우의정으로 기용한다. 이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어 시대의 흐름을 판단하는 당시의 선각자들 간에 크나 큰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김옥균, 김홍집, 박영효 등은 앞으로 시대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된다.     

고종의 의욕적인 출발은 만동묘(화양동서원)를 복설함과 함께 호포법을 폐지함으로써 유림들의 지지를 얻고,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을 금함으로써 백성들의 숨통을 열어주고자 했다. 또한 암행어사의 파견으로 지방 관아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주력한다.     

후에 명성황후라 부르는 중전 민비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기까지 그의 행적을 살펴볼 기회는 24권에서도 계속될 것이지만,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권력투쟁이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치는 영향이 큰 관계로, 둘 사이의 악연이 된 발단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종이 15세가 되던 해 대원군은 척분이 없는 규수 민씨를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는 당연히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고종은 당시 궁인 이씨(상궁이었다고 함)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그렇기에 민비의 몸이 아닌 궁인 이씨로부터 후손을 먼저 보게 된다. 완화군이라 명명하는데, 대원군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1871년 신미양요가 있던 해, 민비는 드디어 원자씨를 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갓 태어난 원자는 대변불통(大便不通: 항문이 완전히 막힌 항문폐쇄증)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게 된다. 이에 민비는 서양식 의술을 동원해서라도 항문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고, 대원군은 장차 종사를 이어갈 몸인데 어찌 쇠붙이로 몸에 구멍을 낼 수 있느냐며 맞선다. 결국 산삼을 달인 탕제를 먹이게 되고 원자는 닷새 만에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민비로서는 대원군이 완화군을 총애하고 있으며, 자신의 몸에서 공주가 태어나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게다가 고종이 친정을 할 나이가 되었고, 중전인 자신의 몸에서 원자까지 태어나게 되면 대원군으로서는 더 이상 섭정을 할 명분이 없어지기에 권력욕이 강한 대원군이 원자에게 독이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탕제를 먹인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원한을 품은 민비는 총명한 머리를 동원하여 여흥 민씨 일가의 파벌을 조성하면서 유림의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한다. 그리고 고종 스스로 친정親政을 선언하도록 유도한다.

제 아무리 왕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왕을 섭정할 권한은 없는 것이고, 왕국에서 왕명을 거역할 신하가 어디에 있겠는가!

비록 비리도 없었고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원군의 일인지배 체제는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었으며, 조선으로서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많은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P/S

1.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 문란하였던 환곡(還穀)·전세(田稅)의 개혁과 함께 군정에도 일대 쇄신책을 단행하면서 호포법이 다시 대두되었다. 1871년(고종 8) 3월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종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하고, 신분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호당 2냥씩을 부과하였다. 이때 양반들의 위신을 고려하여 양반호에 대하여는 호주명(戶主名)이 아닌 하인의 노명(奴名)으로 납입하도록 했다고 한다. 즉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나름 신분을 떠나 조세 균등의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단단히 하고자 노력하였고, 이 점은 후에 등장하는 중전 민비로 인한 일련의 국고 탕진과 비교가 되는 점이다.      

2.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당시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고,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처리했던 인물이다. 당시 그는 제너럴 셔먼호 선박을 수거하여 연구할 계획이었으나 성난 평양군민이 불태워 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그는 신분과 나이 고하를 떠나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들과 깊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를 중심으로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김옥균, 김굉집(후에 김홍집), 박영효등 개화사상에 뜻을 둔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 이동인은 승려 신분으로서 그의 행적은 괴이하다할 정도였으며, 굳이 비교한다면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다 떠나간 인물이다. 그의 대한 간략한 소개를 옮겨 적는다.

“일찍부터 개화된 승려였던 그는 유대치, 오경석 등을 통해 김옥균, 서광범, 윤치호 등의 청년들을 만나 신문물을 전하며 그들과 교류하였다. 1879년 일본불교 부산별원 책임승려인 오쿠무라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일본을 다녀와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1880년 말에는 고종의 밀사로서 일본에 파견됐다. 귀국 후 서울 도착 즉시 이동인은 국왕으로부터 조선국 금위영 예하 별선군관 직책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하게 되었다. 이후 통리기무아문(*조선 개화 정책을 전담하는 일종의 테스크 포스)의 참모관으로서 이동인은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 때에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교섭을 하기도 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시 파견되기 직전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하는데 1881년 5월경 한성부에서 암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인의 암살은 개화에 반대하는 수구 세력에 의한 것(대원군?)이거나, 이동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적 개화를 지향하던 무리 중에서 고종의 총애를 시기한 자(김홍집?)의 소행으로 추측된다.

일본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경우 ‘꿈을 이룬 젊은이를 하늘이 거둬갔다’고 하는 반면, 이동인에게는 괴승(怪僧)이란 칭호만 남게 된다.     

3. 박규수를 위시한 유대치(백의정승이라 불린 한의사), 이동인, 오경석(기미년 민족대표 중 일 인인 오세창의 아버지), 김옥균(갑신정변의 주역) 등은 한국 개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조선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주적인 개화사상을 펼치고자 한다. 청나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과 자주적 개화를 통한 조선의 발전을 꿈꾸며 일생을 투신한 선각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깊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개화 추진 세력을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덧씌우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친일파라면 실학사상을 주도한 북학파 인물들은 모두 사대주의자란 말인가? 

비록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복거일 작가의 "죽은자들을 위한 변명"을 통하여 개념적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     


                                       ---- 조선왕조 500년 제 23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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