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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25. 2023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왕조의 비극]  승

갑신정변의 결정적 원인은 조선의 개화를 위한 방법과 정책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즉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청나라에 의존하는 청나라 양무운동 모델과 조선보다 20년 일찍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메이지 유신 모델 중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놓고 대립한 결과이다.

임오군란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모든 외교와 내치에 전격적인 간섭을 하고 있었고 이는 지난 500년간 이어진 중국 사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암울한 미래를 제시할 뿐 자주 독립의 길은 요원한 것이 된다. 반면에, 당시만 해도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정신적 예속을 당한 상황은 아니고 오히려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 상태였으며, 일본의 군사와 과학기술은 자체적으로 잘 소화되어 받아들이기 용이했던 점은 현실적인 것이라 판단되어 일본을 자주 독립을 위한 디딤돌로 삼고자 계획한 것이 메이지유신 모델이라고 생각된다(*양무운동 모델이나 메이지유신 모델이란 말은 상황설명을 위한 표현이지 학술적 용어나 통용되는 어휘는 아님).     

친청과 친일 세력의 대립구도의 대표적인 예는 묄렌도르프와 김옥균의 갈등이다.

침체된 조선 경제의 활성화와 조세 확보의 방안에 있어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의 발행을 통하여 세수 확보를 하자는 입장이었고, 이에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은 지난 대원군 때 당백전의 예를 들어 극심한 경기 침체만 불러오고 일부 집권층의 배만 불린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끌어와 국방 강화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투자를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묄렌도르프와 김옥균이 대립각을 세운 상태에서 민비를 비롯한 민씨척족과 그 척족을 추종하는 사대의 무리들은 임오군란 때 자신을 구해준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자주개화파들은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폭제가 된 것은 <한성순보>의 연이은 기사였다.

1884년 1월 2일 청나라 군사 하나가 광통교에 있는 한 약포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고, 유야무야 깔아뭉개고 있는 청나라의 태도에 분노의 필봉을 휘둘렀다. 이 내용이 이홍장에게도 보고가 되었고, 그는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한성순보에서 풍문만을 듣고 확이 없이 보도하였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며 심지어 청에 대한 사과를 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상 그 범인은 조선인이 청병의 군복으로 변장한 것이다. 이를 잡아오면 후한 상을 내린다”며 현상금까지 내거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작자들은 힘의 논리에 따라 사실을 호도하고 윽박지르는 행태는 변함이 없다.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던 급진개화파들은 왕권을 제외한 민씨척족세력과 그에 빌붙은 수구 세력들을 일소에 제거하는 길만이 조선의 안위를 위하는 방안이라 결론 내린다. 일본과 협조 체제를 구상하는 중에 청나라가 베트남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른다는 소식이 전해오며, 청나라는 조선 주둔군 3,000명에서 1,500명을 안남지역으로 급파하게 된다.

세력 판도에서 서서히 밀려가던 개화파는 이런 국제 정세를 활용하여 수구 진영을 몰아낼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는데, 김옥균은 고종과의 은밀한 배알을 신청하게 되고 자신의 조선 발전 계획 구상을 고종에게 진정성 있게 설명해 간다. 김옥균의 미래 구상을 경청한 고종은 조선의 자주 독립과 자강의 방책에 대하여 윤허의 뜻을 분명히 밝힌다.     

1884년 10월 17일

개화파의 일원인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국(郵政局) 낙성 축하연을 거사일로 잡아  진행하기로 한다.

중도에 예상과 달리 차질을 빚은 사고가 있었지만, 개화파는 연회장에서 민영익 등을 제거하고 일본군 200여명의 호위 속에 창덕궁에 진입하여, 고종과 민비를 방어가 상대적으로 쉬운 경우궁으로 옮긴 후,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을 발표한다.

제 1항은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봉건적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청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경우궁으로 옮겨진 민비는 경기도 관찰사인 심상훈을 통하여 은밀히 청나라의 공사인 위안스카이에게 군병을 요청하는 밀지를 전달한다. 

고종은 일본에게 병사를 요청하였던 바 있고, 이제는 중전인 민비가 청에게 지원병을 요청하는 경우가 된다. 고종의 의중과 민비는 이처럼 상반된 생각으로 정국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유부단한 고종의 성격과 민비의 정견 간섭이 갑신정변의 결말을 좌우하게 된다.

민비의 요청으로 청의 군사 1,500명이 투입되면서 양쪽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게 된다. 마치 후에 있을 청일 전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수적으로 불리한 개화파가 밀리면서 전세를 뒤집기가 힘들어지자, 일본은 군사 철수의 명령을 내린다.

민비는 무당인 진령군(*진령군은 별도 서술)이 있는 북묘로 미리 피신을 했고, 패잔병이 된 개화파 중 박영교(박영효의 형)와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은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렇게 3일 만에 갑신정변은 실패한 쿠데타로 남게 되고 이를 3일 천하라고 부른다.

설익은 과일은 과일이 아니었음을....     

갑신정변의 결과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漢城條約을 맺어 사의와 배상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조선 국왕의 친서에 의해 군사가 동원되었기에 모든 피해를 조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은 소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양국은 조선에 주둔하는 병력을 철수하기로 하고, 앞으로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있어 파병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에 앞서 문서로 합의할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 조약 중 ‘파병 시 상호통보 조항’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다.

갑신정변의 전후를 통해 본 고종의 성격은 빈틈없는 대원군의 훈육과 손위 부인인 민비의 간교함 속에서 우유부단한 처세로 일관하지만 그의 속내는 자주 독립에 대한 갈망과 부국강병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재야학자이자 몇 해 전 타계하신 이이화에 따르면 “갑신정변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된 조선 왕조를 부국강병의 국민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지식인과 유학생 등 사회 급진 개화파의 목숨 건 몸부림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변 실패 후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5역적으로 규정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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