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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25. 2023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왕조의 비극]  결

을사늑약이후, 1907년 고종은 국권 회복을 위한 마지막 모험을 한다. 바로 헤이그 밀사密使 사건이다.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을 밀사로 삼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압적 지배를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어렵사리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초대장이 없어 본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간신히 기자회견을 가질 수 있었다.

이준은 회담 직후 호텔방에서 화병으로 숨지고 이위종과 이상설은 다른 유럽 제국을 돌면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통감부는 한국 법부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기소하고 1907년 7월 20일 평리원이 궐석재판을 개정하여 이상설은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에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그로 떠난 후 생사가 묘연해져 버렸다.

동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고종에 책임을 물어 강제 퇴위를 시키고 순종으로 뒤를 잇게 한다.     


1908년 3월 23일 일본에 의하여 한국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샌프라시스코에서 일어난다. 일본의 사주를 받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화하던 스티븐스를 미국에 거주하던 장인환과 전명운이 암살한 것이다.

전명운의 권총은 불발이 되어 스티븐스를 총으로 구타하였고 뒤를 이어 장인환이 3발을 쏘았는데 2발은 스티븐스에 명중하고 다른 한 발은 전명운에 맞았다.

전명운은 치료 후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고, 장인환은 10년의 복역 후 석방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동 암살 사건에 사전 모의한 바가 전혀 없었고 우연히 같은 날 같은 인물을 저격한 것이었다. 이심전심으로 구국의 정신이 통하여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이었다(역사학자 이이화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안창호가 결성한 공립협회의 조직원으로서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이 1909년 발생한다.

안중근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다. 탈아시아를 기치로 내걸어 제국주의적 이상을 추구한 흉적을 하얼삔에서 저격한 것이다. 조선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부인한 인물에 대해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안중근의 신념은 조선은 물론 수 천 만 중국 인민의 심장을 울렸고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그와 모친 조마리아의 의기義氣는 조선 민족의 기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고 심지어 그를 신격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내가 아는 이토 히로부미의 원래 이름은 이토 슌스케였고 삿쵸동맹 당시 서구 열강으로부터 무기 밀매에 관여하였으며 후에 영국으로 유학을 잠깐 다녀온 인물이다.

그는 민비 시해부터 을사늑약까지 모든 조선반도 침략의 실질적인 기획을 했던 책임자였다. 대한의 열혈남아라면 그를 저격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의 암살은 실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저격으로 한일합방이 가속화되었다는 일부 논리도 있지만 이는 정말 헛소리라 하겠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방이 진정 현실이 된다.

믿을 수 없고 믿기지 않는 일들이 현실이 된다.

경술국치일은 바로 1910년 8월 29일로 기록된다.     

조선왕조실록 외에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은 9월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이 몸 담아온 왕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그의 만사輓詞(절명시)를 옮겨 적는다.   

  

난리를 겪어오며 머리가 셀 때까지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 해도 이루지 못하였다.

궁궐을 침범하여 주루가 더디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위에 올올이 어리는구나

...........

일찍이 나라위해 작은 공조차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뤘을 뿐, 충忠은 아니구나.

겨우 능히 윤곡(尹穀 : 송나라때 몽고의 침입에 온 가족이 자결함)을 따르는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송나라 때 적을 탄핵하는 상소로 왕에게 죽임을 당함)을 밟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P/S

1. 민비가 행한 국정 간섭의 폐단 중 하나는 바로 진령군(眞靈君)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죽음을 피해 피신하였을 때, 한 무당이 찾아 와 아무 날에 궁중으로 환궁할 것이라 했는데 그대로 맞아 떨어지자 그 무당을 궁궐로 데려오게 되었다. 민비의 병도 다스렸는데 그 무당이 어루만지면 아프던 곳도 나았다고 한다. 그 무당의 건의에 따라 관왕묘를 세우고 진령군에 봉하게 된다. 무당에게 작호爵號를 내린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궁중의 화복을 자신의 손아귀에 쥔 진령군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수령의 자리에 앉히고 서로 의자매나 의자義子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병식(황해도 감사이자 고부군수 조병갑과 사촌지간), 이유인(양주 목사) 등이다. 민비로 하여금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금강산 1만 2천 봉 마다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관왕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하였다. 이런 굿과 사치로 내탕고가 비게 되면 온갖 엽관배가 이권을 팔아 다시 채워 주었다. 이런 마당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불러야 한다는 둥, 혹은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말들이 뮤지컬에 등장하는 작태를 보노라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민비는 왕비에 대한 호칭으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 아닐뿐더러, 명성황후라 한다면 고종을 광무제로 불러야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을미사변 때 상궁의 의복으로 변복을 하고 피신하던 차에 자신이 왕비임을 드러낼 리가 만무하지 않을까? 

만약 민비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탈출이 불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대원군의 집권과 함께 개혁의 의지가 나름 있었던 고종 간의 불화가 명약관화하지만, 민심의 무서움을 깨닫고 새로운 타협안을 모색하였으리라 보인다. 국토 개발권을 팔아 내탕고를 채우는 일 없이 최소한 외세에 의존하여 내치의 안정을 시도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자치가 가능한 경우와 외세의 힘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것의 차이는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박규수를 총애한 적이 있는 대원군과 고종은 어떻게든 완급 조절을 하면서 자생적 발전 모델을 찾고자 했으리라. 임오군란의 발발과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이 숨어 있는 듯하다.     


2. 진령군과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에는 그레고리 라스푸틴이라는 요승이 있었다. 라스푸틴은 본래 떠돌이 수도자에 불과했으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로마노프 황태자의 병을 호전시킨 업적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탄탄한 신임을 얻은 후부터 비선실세가 되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두르면서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크게 일조한 인물이다. 러일전쟁 패배의 요인이 되는 피의 일요일 학살도 라스푸틴에 의하여 저질러진 일이며, 이로 인해 서구권에서 라스푸틴은 간신의 대명사 중 하나처럼 되었다.  

    

3. 갑신정변의 주역 중 일원인 홍영식은 1882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으로 가서 역체국(驛遞局: 우체국)을 시찰하여 우편 제도를 연구하게 된다. 다음 해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전신, 전화, 우편 등 통신과 관련된 기구와 실상을 알아보고, 1884년 우정총국의 총판으로 임명된다. 전통적인 봉수제와 역참제가 없어지고 근대적 우정郵政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갑신정변 거사 일에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 29세의 나이에 변을 당한다. 애석한 일이다.   

   

4. 서재필의 행적은 근대사에 많은 의미를 갖는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으로 향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학업에 열중하여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병리학 박사학위를 딴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으며 1895년 12월 귀국하여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문 건립,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알리는 등 입헌군주제에 기반을 둔 대한제국의 수립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수구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강조한 나머지 세계열강들 또한 그와 생각을 달리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의 아내는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이다.     


5. 동학혁명은 동학의 교리에 따른 동학도들이 주축이 된 반란이고, 동학의 중심사상이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으로서 봉건적 신분제도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의 근대화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인내천 사상은 만민평등주의와 민본주의를 주창한 것이고,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창의斥倭倡義를 기치로 세운 것은 민족주의의 발현이었다. 동학운동의 잔병들은 후에 독립 의병으로서 항일 전선의 선봉에 서게 된다. 비록 모두 실패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리고 1894 동학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6. 동 작품 조선왕조 500년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가 작년 11월이다. 

총 24권의 작품을 읽고 한 권 씩 요약한 시간이 어느덧 9개월이 된다. 그간 요약했던 파일을 모아보니 120쪽에 이른다. 나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만, 과거 역사가 자랑스러운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 듯, 가슴 아픈 순간들이 더 많았다고 하겠다. 

내가 보낸 9개월이 앞으로 내 인생의 10년 동안 많은 영감과 지혜의 원천이 되리라 믿는다. 길고 지루한 시간도 있었지만, 이 같은 분량의 작품을 쓴 작가는 어땠을까. 신봉승 작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생존해 계시다면 막걸리 한 잔 올릴 텐데 아쉽기만 하다.    



            

                                     -----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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