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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25. 2023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왕조의 비극]  기

1873년 대원군은 섭정 정치 10년 만에 고종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가납하고, 자신의 친정을 선언함으로써 정계에서 퇴출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고종은 의욕적으로 개화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반면, 중전 민씨는 대원군의 축출을 기점으로 민씨 척족들을 대거 조정에 유입한다. 그토록 대원군이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를 뿌리 뽑고자 척분이 없는 민씨 규수를 며느리로 앉혔건만, 오히려 민비에게 있어 자신의 집안만이 아닌 모든 여흥 민씨가 척족이 되는 그런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고종의 개화 정책은 갈수록 수구 세력과 갈등을 키워가고 있었고, 민씨척족정권이 저지른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급속한 일본의 경제 침략 등으로 그들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항간에는 ‘민씨(閔氏)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민씨척족의 폐해는 심해져만 갔다.

게다가 청나라의 주일본 서기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 러시아 견제를 위하여 조선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을 주장한 책]에 따라  1882년에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한다. 척화비를 세웠던 조선 백성으로서는 조정의 횡보가 심히 탐탁지 않고 심한 가뭄과 도처의 비리로 민심이반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1882년(고종 19) 7월 23일 발생한 임오군란은 조선의 구식 군대가 별기군(別技軍: 일본에 의하여 창설된 근대식 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 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 사건으로 국가 단위로 군납비리, 병사들에 대한 급여 체불로 인해 발생한 사례이다. 즉 민씨척족이 군사 급료에까지 손대어 챙긴 비리의 결과물이다. 

별기군에 대한 대우와 달리 구식 군대는 13개월에 해당하는 급료가 체불되어 있었고, 그나마 간청에 따라 1개월 치 군료를 지불받게 되었는데, 그 조차도 썩거나 모래가 뒤섞인 쌀로 지급이 되자 이에 분통이 터져 단체 행동에 돌입하게 된다. 선혜청 고직(庫直 창고 관리 책임자)과의 몸싸움은 물론 주무 당상관이자 병조판서인 민겸호(민비의 양오라버니 민승호의 동생)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오히려 난동을 부린 대가로 강경 진압을 당하게 된다. 이에 흥분한 병사들은 이성을 잃은 폭도로 발전하게 되고, 동시에 수많은 백성들도 가담하게 됨으로써 군란이 아니라 군과 민에 의한 난亂이 된다. 그들은 민씨 척신들과 관료의 집을 습격하고 마침내 이최응(대원군의 친형이지만 그와 대척점에 있던 인물), 민겸호(병조판서), 김보현(경기 관찰사)을 아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일본 병사 몇몇이 사살되고, 이에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모든 문서와 공관을 불태우고 인천으로 피신하여 본국으로 도망을 친다. 

흥분한 그들은 수구 척사 세력의 수령인 대원군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를 호위하여 궐내로 진입하게 된다. 폭동의 무리는 모든 비리의 정점에 있는 중전 민비를 죽이고자 궐 안을 헤매지만, 민비는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가마에 뛰어들어 궁녀의 옷으로 환복함으로써 신분을 감추고, 때 마침 나타난 무예별감 홍재희가 ‘궁녀로 있는 자신의 누이가 병들어 출궁중’이라고 둘러대며 민비를 등에 업고 궁 밖을 빠져 나간다. 이렇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민비는 여주를 거쳐 충청도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까지 가서 몸을 숨긴다.

폭도의 무리와 함께 다시 입궐하게 된 대원군은 고종으로부터 다시 섭정의 권한을 맡아 달라는 청을 접하게 되고 대원군의 재 섭정이 시작된다. 정확히 만 9년 만이다.

재집권을 하게 된 대원군은 흥분한 병졸들을 위로하고, 사라진 민비를 난중亂中에 죽은 것으로 공표하여 국장을 준비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비록 시신을 찾지 못했지만, 만약 살아 숨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숨 죽여 있으라는 메시지였다. 혹은 밀정을 보내어 죽일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민비는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어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군사 파병을 요청하기를 간청한다. 이에 고종은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게 되고, 청의 군사가 합법적으로 조선 땅에 진입하게 된다.        

한편, 대원군으로 인해 조정의 분위기는 그간 진행된 개화에서 다시 수구 척사로 방향을 틀게 된다. 여기에서 대원군이 간파하지 못한 점은 당시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군사중심의 근대화 운동으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정책)이 진행 중이었고,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국으로서 그들의 발언권을 잃지 않기 위해 조선과 서양 열강과의 강화를 자기 중재 하에 진행되도록 금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대원군의 수구세력은 그들의 생각과 시각이 달랐고, 오히려 청나라를 중심으로 진행시키고자 했던 조선의 개화라는 마스터플랜에 차질을 빗게 만드는 존재였다. 허나, 이를 모르는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가 일본과의 협상에서 그에게 힘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청은 이 같은 대원군의 허점을 이용하여 그를 청의 군진軍陣으로 초대, 납치하여 청나라 천진으로 호송하게 된다. 대원군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고 3년간 청나라에서 유폐(幽閉)생활을 겪게 된다. 33일간의 천하였다.     

대원군의 납치가 이루어지자, 청나라의 입김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난군亂軍을 소탕하고자 주모자를 물색하여 처형하기 시작하며 조선의 군제를 개편하고 심지어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경제 외교 고문으로 심어둠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다른 한 편, 일본은 일본대로 군란으로 입은 인적 물적 피해 보상을 주장하는 협상을 개진한다. 결국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물적 배상은 물론이고 일본은 공사관의 안전을 위하여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된다.

군란의 해결을 위하여 조선 조정은 결과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를 영내에 유입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조정은 자치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없음을 만방에 알리는 꼴이 되어 세계열강의 좋은 먹잇감임을 스스로 천명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임오군란은 민씨척족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난 군민의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의 호송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은 민씨척족은 그들의 정권 유지에 급급하였으며, 조선정부는 민씨척족과 개화파 관료계층 사이에 친청親淸과 친일親日 정책의 두 부류가 생겨나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결국 2년 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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