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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25. 2023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4 권 [왕조의 비극]  전

갑신정변으로부터 동학혁명,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 직전까지 10년간을 태평십년太平十年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태평성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세의 빠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채 보낸 허송세월虛送歲月의 비유적 표현이다.     

1894년 조선반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3차에 거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이 연쇄적이자 동시에 병행하여 진행된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반발하여 의거한 1차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 처벌 등의 약속으로 평화적으로 매듭짓는 듯이 보였으나,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도들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여 무고한 농민들을 역적으로 처벌하는 등 강경 진압을 하게 된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무장 항전을 하게 되는데 이를 2차 동학농민운동이라 부른다. 동학도들의 2차 봉기는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정읍 덕천면)에서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하고 4월에는 전주성까지 손에 넣는다. 

당황한 고종과 민씨 세력은 또 다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첸진조약을 근거로 병력을 파견한다.

외세가 개입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자 농민군과 관군은 청, 일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는데 이를 <전주화약全州和約>이라 한다.

전주화약에도 불구하고, 양국군이 귀환하지 않자,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지만 청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일본은 3년간 청나라의 연금 생활에서 풀려나 은둔하고 있던 대원군에 동참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노탐인지 아니면 구국의 일념 때문이었는지 대원군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894.6.21.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으로 입궁한다. 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의 무력 입궐을 경복궁 쿠데타 혹은 갑오왜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다시 집권을 하게 된 대원군은 일본의 지시에 따라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 개화 세력의 내각을 구성한다. 김홍집 내각은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한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는 통고를 보내게 되는데, 이는 일본의 강요로 청과의 국교를 단절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6월 23일 수원부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과 일본군의 충돌이 일어난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갑오경장)이라 일컫는 내정 개혁안을 반포하는데, 주요 내용은 신분 제도의 타파, 연좌제의 폐지, 공사 노비 문서 혁파 등 급진적인 변혁을 시도한다(*동학군이 전주화약에서 제시했던 폐정개혁弊政改革 내용과 많은 부분이 겹치는데 이로 말미암아 근대화의 시발점이 동학혁명인지 갑오경장인지 여태껏 논란이 많다).

그리고 명분상 추대했던 대원군을 청나라 장수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4개월 만에 끌어 내린다.

한편, 전주화약으로 철수한 동학군은 일본의 갑오왜란에 공분하여 재집결한 후, 일본군이 가세한 관군과 재차 항전에 돌입한다. 일진일퇴의 상황이 이어지지만, 우세한 일본의 화력 앞에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밀고자로 인해 그 해 12월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가 된다.      

청일전쟁에 있어 7월 1일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양국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는데 이를 전후하여 비슷한 시기에 동학혁명, 갑오개혁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이 됨으로써 조선은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 그 자체였다. 조선이란 땅덩어리 내에서 청일 양국 간에 총질을 하고, 관군은 동학군과 싸우고, 신분제 타파를 외치는 내정 개혁안이 반포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개전 초기부터 전세가 불리해진 청은 이홍장을 통하여 서구 열강에 조정을 청해 보지만 묵살을 당하고, 일본군은 청의 본토까지 진입하게 된다. 결국 1895년 4월 항복 선언과 마찬가지인 세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청은 일본에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과 함께 요동반도와 대만, 팽후 제도 등을 할양하기로 한다.

요동반도는 동아시아의 주요 거점으로서 이를 일본이 확보하게 되자,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고자 요동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은 이들과 상대할 여력이 없음을 알고 러시아의 요구에 순응하게 되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외교에서 실패한 전쟁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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