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때 도착하지 못한 가을

by 박홍시

8월 7일은 입추였습니다.

立秋. 가을이 시작된다는 뜻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한 해를 24절기로 나눠 계절의 흐름을 짚어냈다던데,

입추는 그중 13번째 절기.

한 주기의 반을 넘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을이라니요.


하늘은 여전히 낮고, 햇살은 피부를 찌르고,

최고기온은 34도까지 치솟았습니다.

입추라 불리는 이 계절의 문턱에서

저는 선풍기 앞에 축 늘어진 채로 이 문장을 씁니다.


가을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우리가 세상을 망친 건지,

조상들의 달력이 틀린 건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뻔하기만 합니다.


저는 환경 보호라는 말을

주입 당하며 자란 세대입니다.


학교에서는 공모전을 열고,

교실에서는 교육 영상을 틀고,

가끔은 교정에 나가 다 같이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지구를 지켜요."

"아껴 써요, 바꿔 써요, 다시 써요." (이건 제 세대는 아니긴 한데 생각나는게 이거 뿐이네요 ㅋㅋ)

익숙한 문장들이었죠.


하지만 그 모든 실천이 정말 ‘진심’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오염시킨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치워야 하지?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 지구의 상처를 왜 우리가 메워야 하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없는 질문이었지만,

또 너무 어린 마음이어서 그런 질문도 이해는 됩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저는 딱히 환경 보호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분리수거를 하고,

길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전기를 조금 아껴보는 정도랄까요.


그마저도 늘 어설프고,

종종 까먹기 일쑤입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얼마 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다시 봤기 때문입니다.


신극장판도 보고,

구판도 정주행했어요.


어릴 적엔 그냥 멋진 SF물이라 여겼고,

중고등학생 때는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로 다가왔죠.


그리고 지금, 20대의 입추에 다시 본 에반게리온은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에반게리온의 세계는 폐허입니다.

붉게 물든 바다에는 아무 생명도 없고,

땅은 갈기갈기 찢겨진체 피칠갑이 되어 사람들의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참혹하다’고만 느꼈던 그 장면들이

참혹하고, 끔찍하고, 안타깝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어졌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귀한지를.


그냥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죠.


하지만 산과 들이 사라지고,

풀벌레가 울지 않고,

물소리조차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우리의 아이, 손자, 그 후의 아이들은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건 끔찍한 일일거에요.


물론 저는 지금도 게으르고 무기력합니다.

앞장서서 세상을 바꾸고, 자연을 지켜내는

그런 위인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조용히 움직이려 합니다.


조금 더 철저히 분리수거하고,

쓰레기를 줍는 걸 망설이지 않고,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여는 일을

습관화 해보려 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우리나라 쯤이야."


그런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지구라는 집에 조금은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입추의 바람은 아직 느껴지지 않지만,

언젠가는 계절이 바뀌듯

세상도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저 바람 한 줄기쯤 되는 사람이지만

그 바람이 어딘가로 향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 혼자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잠시라도 자연을 떠올려주신다면

그걸로 저는 충분합니다.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그렇게 믿어봅니다.


그리고, 다음 가을은

입추에 맞춰 제때 도착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3화떡라면 울렁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