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라면 울렁증

by 박홍시

따가운 볕이 정수리를 달구는 흔해 빠진 여름이었습니다.


그 날따라 점심 먹을 시간이 애매하게 떠버려서 분식집에 갔드랬죠.

집앞 상가에 조용히 자리 잡은 분식집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 집에 이사오고 강산이 한번하고 반 바뀌었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분식집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24시간 가리지 않고 불쑥 찾아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드물었기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증권사 모니터처럼 깨끗히 나열된 무수히 많은 메뉴들은

자신의 강점을 뽐내지도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의 지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선택장애에 빠지기 딱 좋죠.


슬쩍 눈에 걸린 '돈가스' 세 글자.

음식 모습을 상상하자 참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바삭바삭한 튀김옷, 새콤달콤한 소스, 나이프로 푹 찔렀을 때 옆구리로 삐져나올 치즈까지…

치즈돈가스를 주문했습니다.


주문을 하고도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치즈돈가스를 취소할까, 이걸 주문할까, 저걸 주문할까.'

그렇게 눈을 굴리던 도중, 한 메뉴가 눈에 띄었습니다.


떡라면.

이 세글자에 저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젖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 바뀔 정도로 오래 전으로요.


고등학생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몸이 아파서 휴학 중이었죠.


그리고, 사랑하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름도 시큼한 첫사랑이었고, 지금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아프게 사랑했습니다.


그 녀석이 어느 날 뇌수막염에 걸려 급하게 입원을 하게 됐습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다행히 정도는 경미했고, 빠르게 조치를 받아 큰 위험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경험은 처음이라 너무 무서웠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그 날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지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죠.


병원은 지하철 역 두 개 거리.

택시, 버스, 지하철… 방법은 많았지만 그땐 달리는 법밖에 몰랐습니다.


도착한 병원은 침울했습니다.

시퍼렇게 멍든 하늘 아래, 빗물에 쩔어 우중충한 건물.

안 역시 밝을 리 없었고, 저도 그랬습니다.


서둘러 전화를 걸어 병실을 물었습니다.

그때는 전염병이 유행하지도 않았고, 면회 조건도 느슨했거든요.


연결음이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첫 번째 통화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

세 번째에서야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착잡했던 입술엔 핏기가 돌고, 감겨 있던 눈엔 다시 생기가 돌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왜 왔냐는 반문, 부모님에게 혼날거라는 걱정,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오면 어떡하냐는 타박, 도로 돌아가라는 요구가 순서대로 날아왔습니다.

그제서야 기억이 났습니다.

그 친구 부모님은 절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건데, 공부해야 할 시기에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못마땅해 하셨더군요.)


저는 다시 병원 입구로 돌아왔습니다.

자동문은 제 마음을 모르고 계속 열리고 닫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썹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병원 모든 층을 뒤져 여자친구를 찾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분명 머리 위 어딘가에 누워있을 텐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병원 밖으로 나왔습니다.

눈과 몸에선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눈물과 콧물을 옷소매로 대충 훔치고,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다스려보려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참 웃기게도 배가 고팠습니다.

밥도 안 먹고 마구 뛰어온 데다, 감정을 눈물로 다 쏟아내니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슬프고 당혹스러운 마음과 뱃가죽은 서로 전혀 합의가 안되고 있었습니다(웃음).


결국 병원 앞 분식집으로 향했습니다.

24시간 운영되고, 아주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계신 평범한 분식집이었습니다.


청량한 종소리가 울리고, 아주머니는 졸음을 쫓으며 다정하게 인사하셨습니다.

분식집엔 저와 아주머니뿐.

삐걱이는 주황색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습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 대충 눈에 띄는 떡라면을 주문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주문한 뒤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께 부끄러웠지만, 거칠게 껄떡이는 숨소리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뜨겁게 끓는 라면, 그 사이사이에 떡국떡이 품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김밥이 조심스레 옆에 자리 잡았습니다.


“학생, 너무 울지 말어. 김밥 서비스로 줄 테니까 먹고 힘내.”


그때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마운 분입니다.


싱겁고 비릿했던 그날의 떡라면은 잊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눈물과 콧물에 뒤섞여, 맵고 짠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음식보다 제 마음을 강하게 긁고 지나갔습니다.


그날 이후, 제 메뉴판에서 떡라면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아무 잘못 없는 떡라면이었지만, 그 한 그릇 속에는 그날의 눈물과 콧물이 그리고 빗물이 고여 있었으니까요.


오늘 문득 메뉴판에서 떡라면을 마주한 순간,

그날의 아주머니 목소리와, 아직 젖어 있던 마음 한 귀퉁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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