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억울한 일이 이따금 있습니다.
정신이 나간 듯한 제가 무언가 사고를 치고, 나중에 정신이 돌아온 제가 그 책임을 떠안는 식입니다.
ADHD의 주요 증상 중 하나는 ‘충동을 조절하기 힘든 것’입니다.
늘 이 때문에 사고를 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이 나갔다기보다도,
어떤 강렬한 충동이 일순간 몰려오고,
그걸 억제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폭풍처럼 감정이 몰아치고 나면, 낭비, 실수, 후회 같은 잔해들이 주변에 흩뿌려져 있습니다.
속되게 말하면 눈깔이 뒤집히는 거죠.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일도, 그런 식으로 벌어진 사고입니다.
너무 심심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고,
한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게임 목록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하나를 더블클릭했습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게임 창엔,
신상 아이템들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저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출시되었더군요.
요즘 게임사들은 뽑기로 돈 버는 것에 맛이 들려있습니다.
게임 좀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뽑기 없는 게임은 없습니다.
이 게임도 예외는 아니었죠.
뽑기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1. 현금을 게임 재화로 환전
2. 아주 낮은 확률(사실상 0%에 가까운 확률)로 뽑기를 돌림
3. 의미 없는 쓰레기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옴
4. 일정 횟수마다 보상 재화 지급
5. 이걸 모아 최종 아이템과 교환 (이른바 ‘천장’ 시스템, 보통 '천장을 친다'라고 표현합니다)
표면상 뽑기지만, 실상은 굉장히 비싼 가격을 눈에 안 띄게 가려놓은 정가제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제가 원하는 아이템들을 모두 얻기 위해서 계산을 해봤습니다.
천장을 치는 데 필요한 금액은 대략 80~90만 원 선이었습니다.
저는 캐릭터 3개와 예쁜 외형 아이템들이 탐났고, ‘5만 원만 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물론, 당첨되지 않았고, 그다음도, 그다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제하고 뽑고,
결제하고 뽑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반복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통장은 텅장이 되어 있었고
손에는 캐릭터 셋과 화려한 아이템들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잔돈과 용돈을 아껴가며 모은 60만 원이
이유도 모른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도둑맞은 것도 아닌데,
억울함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모든 일은 분명 제가 했는데도,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내가 벌여놓은 일에,
현재의 내가 뒤늦게 청소부처럼 나서야 했습니다.
너무나 아깝고,
너무나 어이없고,
너무나 저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얻은 건 캐릭터 셋과 장식품 몇 개,
잃은 건 몇 달간의 자그마한 성취와,
무너진 자존감이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내가 저지른 일’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고,
병 탓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ADHD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걸 변명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를 미워하지 않고는
어떻게든 나 자신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는 게, 지금의 진심입니다.
지금도 게임 속 캐릭터들은 귀엽게 웃고 있는데,
제 속은 아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네요.
혹시 여러분도,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자괴감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그럴 땐 어떻게 자신을 다독이시나요?
실수를 저지른 자신을, 어떻게 용서하시나요?
저는, 원하는 것들을 예상보다 싸게 얻었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얻은 것은 사랑하고, 잃은 것은 놓아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실수한 나를 안아줄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법,
사랑하는 법,
그리고 흘러간 것을 흘러가게 두는 법이,
정말로 궁금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