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맘 먹고 장비를 하나 질렀습니다.
요즘 들어 프라모델용 니퍼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게 손끝에서부터 느껴졌습니다.
처음 샀을 땐 마치 종잇장처럼 ‘쓱’ 잘리던 부품들이, 이제는 ‘딱! 딱!’ 소리를 내며 저항을 일으킵니다.
손에 힘도 점점 더 들어갑니다.
니퍼 겉엔 슬슬 녹이 올라오고, 날은 무뎌졌습니다.
불과 두어 키트 만들었을 뿐인데, 겉보기엔 10년은 쓴 것 같더군요.
이 니퍼도 나름 3만 원짜리였습니다. 당시엔 꽤나 큰 결심이 필요했죠.
하지만 이번엔 그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갓핸드의 ‘궁극니퍼’.
이름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회사 이름은 신의 손, 제품 이름은 궁극.
대단한 건지 허세인 건지, 애매하게 무게감이 있죠.
가격은 6만 원을 넘습니다.
취미용 니퍼에 6만 원이라니…
매대 앞에서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했는지 모릅니다.
“이게 맞나?” “진짜 그렇게까지 다를까?”
하지만 제 머릿속을 가장 크게 흔든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내가 이 정도 니퍼를 써도 될까?”
전문가도 아니고,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리뷰어도 아닙니다.
그래서 고급 장비를 쓴다는 게 괜히 민망하고, 스스로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샀습니다.
그리고, 써봤습니다.
처음 자르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진 느낌은 단 하나.
“아, 이래서 다들 궁극 궁극 하는구나.”
부품이 아니라 공기를 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딱’ 하던 부품들이 ‘쓱’ 하고 나풀거리며 떨어졌습니다.
힘은 들지 않았고, 공정은 반으로 줄었습니다.
사포질도 거의 필요 없을 만큼 아름답게 절삭됩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했습니다.
좋으면서도 “내가 이걸 써도 되나?” 하는 혼란이 밀려왔습니다.
축구 처음 하는 사람이 최고급 축구화 신고, 홀란드 유니폼 입고 나온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죠.
하지만 괜히 위축됩니다.
마치 누가 한마디 할 것 같고, 뒷담이라도 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궁극니퍼는 난이도가 있어 초보에겐 추천되지 않습니다.”
“내구성이 약하니 민감하게 관리하세요.”
“처음에는 막니퍼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자존감은 니퍼로 깎듯이 점점 깎여나갔습니다.
괜히 돈을 낭비한 것 같은 기분이 발바닥부터 올라왔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주눅 들고, 스스로를 깎아내립니다.
그러던 중 문득 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총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였죠.
그 친구는 오랫동안 모형총을 갖고 싶어 했고, 결국엔 해외직구로 권총 하나를 샀습니다.
한국은 총기 관련 규제가 엄격하니 웃돈을 얹고 개조까지 맡겼습니다.
총구에 컬러 파츠를 달고, 위력을 낮추고, 어렵사리 들여온 비비탄 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쏘지도 않고, 장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닦고, 기름칠하고, 가끔 손에 들고 감상할 뿐이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야, 게임도 안 나가고, 쏘지도 않는데 왜 산 거야?”
그 친구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좋아서 샀지.”
그 말이 마음 깊이 꽂혔습니다.
좋아서 샀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걸 사는 데,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
누가 뭐라 하든, ‘좋아서 샀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초보자가 고급 장비를 써도 됩니다.
입문자가 비싼 유니폼을 입어도 됩니다.
자전거를 시작하려는 사람이 비싼 자전거를 사도 됩니다.
그게 기쁨이고, 만족이고, 동기이니까요.
누군가는 ‘과분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 기준일 뿐, 내 삶의 만족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걸 쓴다는 건, 실력보다 훨씬 큰 행복을 줍니다.
지금 이 순간, 책상 앞에서 궁극니퍼를 쥐고 있는 제 마음처럼요.
궁극 니퍼는 누구 손에 들려있던지, 그냥 묵묵히 플라스틱을 잘라내기만 하면 됩니다.
남들의 시선을 사서 걱정하며 싼 니퍼를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장비를 사서 즐겁게 취미를 즐기고, 그것에 만족하고 결국 행복해지면 그만입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분함과 현명함을 결정짓는 것은 마음가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