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비인두암 4기 판정을 받고 3개월 동안 5번의 항암주사를 맞았다. 5번째 항암주사는 서울 병원으로 진료이전 후 맞았다. 부산 대학병원에서 맞았던 4번의 항암주사제와는 다른 것을 써보기로 했다. 담당교수는 이전과 달리 좀 더 강력한 주사를 처방하겠다고 했다. 아빠 몸에 퍼진 암세포가 이 항암주사에 반응을 하는지, 여전히 꿈적 않는지 보고, 그다음 치료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3월 11일 항암주사 맞기로 한 날, 아빠와 동생은 2시간 30분 기차를 타고 힘겹게 올라왔다. 3주 전 진료예약을 했지만 암환자라고 예외는 없었다. 진료실 앞에서 1~2시간가량 대기를 해야 했다. 오늘도 아빠를 보기 위해 서울에 사는 큰 고모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오빠. 나 왔어~ 아직 진료 안 봤지? “
“응 왔나~?”
오빠.. 3주 전에 봤을 때보다 목이 더 부었네?…”
“그렇나?..”
아빠의 양쪽 목덜미에 있던 암이 점점 커져갔다. 쇠약해지고 갈수록 힘들어하는 아빠를 보는 고모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모는 아빠가 서울 병원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아빠 곁을 지켜주었다. 담당교수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는 2시간 동안 아빠는 고작 물 한 모금과 진통제를 삼켰다. 이제는 약 이외는 어떤 것도 식도로 삼킬 수가 없었다. 얼굴에도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암환자들의 대기시간은 또 다른 고통과 다름없었다. 담당교수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고작 3분. 체감은 1분인데 기다리는 시간은 1~2시간은 기본이었다. 어떤 환자는 멀리서 힘들게 왔는데 당일 항암주사 처방이 어려워 다른 날 예약을 하고 다시 와야 한다는 간호사에게 호통을 치며, 주사 놔줄 때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복도를 꽉 채운 환자와 보호자들의 신음과 한숨이 대기실을 꽉 채웠다. 모두 길어지는 대기시간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아빠도 말하는 것도 힘들어할 만큼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아빠 곁에 자식 둘, 형제까지 마음만은 든든했을 거라 믿고 싶다.
“아빠? 아빠는 지금껏 살면서 6남매 형제 중에서 누구랑 제일 친했어?”
“아빠는.. 영자 고모랑 친했지”
“큰 고모가 바로 아래동생이라서 편했구나? 형들은?”
“형들은 다 뭐.. 어려웠지”
내겐 남동생 하나만 있다, 내가 낳은 자식도 한 명이라 형제가 여럿인 기분은 어떨까 늘 궁금했다. 아빠에겐 위로 형이 3명이나 있었지만 형보단 바로 아래 여동생과 제일 친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빠와 많은 추억을 나눈 형제답게 큰고가 아빠를 많이 찾아오고 살뜰히 챙겼다. 고모의 지극정성에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왜 이런 소소하고 일상적인 질문들을 40 평생 아빠에게 한 번도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나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좋은 일, 힘든 일 있으면 부모에게 털어놓으며 마음의 무게를 덜고 살았는데, 아빠는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지 내가 묻지 않으면 아빠가 먼저 나누지 않으니 가깝고도 먼 사이나 다름없었다.
슬프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친구, 동료, 형제들이 아빠와의 추억과 미담을 털어놓을 때 그때 아빠를 가장 많이 알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런 일을 겪었었구나. 그리고 내가 아빠와 닮은 점이 많다는 것도 아빠가 곁을 떠난 후 알게 되었다.
아빠와 좀 더 친하게 지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