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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두고 나왔습니다

덜어내는 산책

by 간달프 아저씨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조심스럽게 열고,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먼지를 털고, 접어두고, 정리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찝찝하긴 해도,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그다지 손해 보는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즘의 저는 좀 그런 상태예요.

여러 고민이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생각의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은 끝이 없고,
보아야 할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채워버리면
오히려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움직이기도 싫어지고, 머릿속은 점점 무거워지고, 몸은 눌리듯 느려지고,
어쩌면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내면의 과부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작은 결심을 하나 했습니다.
바로, 이어폰을 들고나가지 않기로 한 것.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이 결심에는 제법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폰은 늘 핸드폰과 연결되어 있었고,
핸드폰은 늘 뭔가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매개체였고,
그 매개체는 항상 제 머릿속에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집어넣고 있었거든요.


더는 채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입력’이 아니라 ‘정리’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지만요.

그래서 이어폰 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소리 없이 걷는 길,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산책이 처음엔 조금 낯설었어요.
귀가 허전하고, 손이 핸드폰을 자꾸 찾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리고,
옆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부는 바람 소리도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걸었고, 주위를 천천히 바라보았습니다.
낯선 얼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햇살 아래 빛나는 물기.

이어폰을 두고 나온 길 위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나'를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무겁게 했는지, 어떤 것들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지,
다시 움직이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요.


모두가 바쁘게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더 넣는 데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요, 어쩌면 진짜 필요한 건 잠시 덜어내는 용기일지도 몰라요.

이어폰 없이 걷는 이 시간, 조금씩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듭니다.
답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지러운 생각들 사이에서
나를 붙들고 갈 작은 실마리 하나쯤은 잡아본 것 같습니다.


오늘의 나에게 해준 선물, 그건 아주 조용한,
소리 없는 산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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