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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가끔 늦게 도착한다

염세주의와 INFP 사이 어느 즈음에..

by 간달프 아저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였다.

커튼을 젖혀보니, 세상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기차처럼, 일정하게, 무심하게.


누군가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또 울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감정의 균형을 잃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세상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아픈 곳이긴 해도, 결국 사람들은 따뜻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거라고.

하지만 자라면서 나는 그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거짓말을 밥처럼 뱉는 사람들, 상처를 장난처럼 주고받는 말들,

정직하면 손해 보고, 조용하면 밀려나는 세상.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자꾸 어떤 목소리가 올라왔다.

‘너무 순진했어’,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그만 기대해, 이제 좀.’


그건 염세주의의 목소리였다.

내 안에 조용히 숨어 있다가, 슬픔이 깊어질 때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가와 나를 토닥였다.

“봐, 내가 맞았잖아.”


INFP.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상주의자, 감성적인 중재자, 조용한 혁명가.

하지만 그런 말들이 나를 보호해 주지는 않았다.

현실은 종종 이상보다 거칠었고,

내 마음은 그 현실 앞에서 너무도 쉽게 멍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아주 작은 순간들이 나를 다시 붙잡았다.


편의점 앞에 앉아 라면을 나눠먹던 노숙자와 자원봉사자의 눈빛,

문득 날아든 친구의 “요즘 어때?”라는 한 줄 문자,

쓰다 만 노트에 남겨진 나 자신의 문장.

"힘들어도, 다시 해보자."


그것은 아주 작고, 조용한 희망이었다.

인생을 바꾸진 못했지만, 내 하루를 바꿨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다시 기도를 했고,

다시 책을 펼쳤다.


나는 여전히 INFP다.

쉽게 상처받고, 깊게 느끼고, 멀리 보는 사람.

그리고 나는 안다.

희망은 가끔 너무 늦게 도착하지만,

그래도 늘 도착한다는 것을.


그러니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다시 희망이 나를 찾아오기를.

아니, 어쩌면 내가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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