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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장 앞에서 시작된 10km

그냥.. 나는.. 해야만 했다..

by 간달프 아저씨

오늘도 하늘 위 저물어가는 해가 하루의 끝자락을 알린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진 해님은, 밤의 도래를 조금 미뤄주는 듯하다. 덕분에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 발걸음은 가벼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무거운 듯, 애매한 마음을 안고 재촉된다.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들을 뒤로한 채 도착한 집 앞. 띡띡띡띡, 이익. 문을 열자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아빠!"라는 외침, 그리고 주섬주섬 집을 정리하는 아내의 모습. 나는 다시금 ‘가장’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실감한다.

아이를 바라본다. 어젯밤 굿 나이트 키스 이후 또 한 뼘 더 자란 것 같다. 자기 방에서 신나게 놀다가 나를 보며 같이 놀아 달라고 조른다. 그러나 오늘따라 백 퍼센트의 열정으로 놀아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든다. 어쩌면 이는, 오늘 하루 나의 일과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짧은 근황 토크. 서로의 하루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나의 힘듦이 조금 더 크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숨긴 채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아이의 일과, 아내의 일과, 서로의 이야기. 평범한 가정의 식탁 위엔 그런 평범함이 놓여 있다.

식사가 끝나면 정해진 루틴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설거지를, 누군가는 빨래를, 또 누군가는 아이를 씻기고 책을 읽어준다. 그리고 아이를 재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이렇게 반복된다.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

문득 생각해 본다.

"오늘, 나 자신만을 위해 한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

책을 잠깐 읽은 것 외에는,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된다.

"나가서 집 앞 공원을 10킬로만 뛰고 올까?"

러닝을 즐기는 나는, 지친 몸에게 밤 10시에 뛰자고 제안한다. 곧바로 머릿속에서 장점과 단점을 따지기 시작한다. 장점은 많다. 마라톤 훈련 마일리지 축적, 복잡한 생각 정리, 몸속 불필요한 땀 배출.

그런데 딱 하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몸이 너무 지쳐 있다는 것.

러닝복으로 환복 하고, 신발장까지 가서 나이키 페가수스 러닝화 끈을 묶을 의지가 부족하다. 주옥같은 장점들과 지친 몸의 외침이 머릿속에서 싸우는 사이, 10분이 흘러간다.

"이러다 너무 늦겠다." 생각을 접고 외친다.

"일단 신발장까지만 가자."

작은 움직임이 모든 것을 바꾼다.

스트레칭을 하고, 러닝 어플을 설정하고, 나는 집 앞 공원에서 10킬로 여정을 시작한다.

100미터, 200미터, 1킬로. 밤 러닝의 탁월한 선택에 내심 뿌듯해진다.

2킬로, 3킬로. 호흡이 돌아오고 여유가 생긴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인생 이야기도 나누고 싶을 정도다.

4킬로. 기록을 확인한다.

조금만 페이스를 올리면 5킬로 개인 기록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욕심이 생겨 속도를 올린다.

그리고, 해낸다. 5킬로 개인 기록 경신.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직 5킬로가 더 남아있다.

6킬로 지점, 발이 무거워진다. 7킬로 지점, 아까 욕심부린 것을 후회한다.

10킬로 완주가 목표인데, 걷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진다. 그러나 다짐했다.

"목표 거리를 정했으면, 절대 걷지 않는다."

8킬로. 페이스를 더 낮춘다. 이제 끝이 보인다.

완벽한 하루를 만들 수는 없어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나를 붙든다.

9킬로. 남은 1킬로.

10킬로.. 러닝 어플의 목소리가 도착을 알린다.

바로 기록을 멈춘다. 걷기 시작한다.

기록 확인. 만족스럽다. 페이스 확인. 흐뭇하다. 몸에 밴 땀 냄새. 대견하다. 지쳐버린 다리까지도 사랑스럽다.

"오늘, 나는 내 하루에 당당하다."

러닝화를 신기 전 망설이던 나에게 조용히 메시지를 보낸다.

"다음에도 같은 고민을 할 때, 이 느낌을 기억해."

나는 러닝을 참 좋아한다. 뛸 때마다 새롭고 소중한 메시지를 받는다.

목표를 정하고 끝까지 멈추지 않기. 꾸준히 쌓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거리.

무리하면 몸이 보내는 경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이 모든 것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뛰고 싶다. 모레도 뛰고 싶다. 그리고 오래오래 달리고 싶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도 당당하게 골인하기 위해서.

풀코스 42.195킬로. 삶으로 치면 나는 이제 하프를 넘긴 셈이다.

삶을 돌아보니, 지금까지는 조금 오버페이스였다.

가끔은 걷기도 했고, 멈추기도 했고, 다시 돌아가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나만의 속도를 찾았다. 나만의 페이스를 찾았다.

앞으로는 뛰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를 즐길 것이다.

로드 마라톤도, 인생 마라톤도.

완주를 위한 준비는 끝났다.

이쯤에서 내 42.195킬로의 결말을 상상해 본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나의 골인은 분명 멋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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