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리탐방지원센터, 신선봉너머 진부령을 향해 첫발걸음을 떼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였건만,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자연은 끝내 날 외면했다. 불과 며칠 전, 추암 촛대바위에서 천지신명과 태양신께 두 손 고이모아 합장하며 간절히 빌어도 보았건만 모든 게 한 여름밤의 꿈이되고 말았다. 영험하기로 소문난 영월땅 선바위산 소원바위와 부처님 진신사리께도 간청하여 보았지만 날 철저히 외면해 버린 것. 과연 나의 꿈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줄리의 법칙은 존재하는가
행운은 나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바램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줄리의 법칙은 없어 보였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까지는. 끝내 천왕봉은 날 받아주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미묘한 여운만을 남겨둔 채, 더 기다리라 했다. 더이상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가늠조차도 되지 않았다. 특별한 연휴가 되어 주리란 믿음이 갈기갈기 찢기어져 버린 5월 연휴. 중년 삶의 무언가 전환점이 되어주리라 나름 기대했었는데 기대는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고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설렘으로 중무장한 채 남녘으로 떠나가는 룰루랄라 길에, 난 난데없이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듯한 이 메시지는 기상특보였다. 이 시기에 호우주의보라니. 그것도 5월 초에. 하필이면 내가 대간 마루금 출정가를 외치던 그날에. 난데없이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날아온 한통의 문자를 받아 들고 잘 달리던 차를 고속도로 졸음쉼터에 멈춰 세웠다. 관성에 의해 달리던 차도 나도 그져 의아하고 멍했다.
꿈인지 생시인지조차도 의심스러워 종아리를 세차게 꼬집어 보았건만 분명 생시가 맞았다. 지리산 벽소령대피소에 숙소 예약을 마치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생각했다. 이제 대망의 출정가를 불러야 할일만 남았다고 자축하며 휘파람만 불고 있었는데. 그곳 대피소에서 벽소령 달밝은 밤의 드라마를 꿈꿔보고 싶었건만 아닌 낮중에 날벼락이었다. 내가 너무 삼페인을 일찍 터트려 버린 걸까.
그렇다면, 솔로몬의 지혜라도 빌려와야 하지 않을까. 아차.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지. 발만 동동거리며 애꿎은 지붕만 쳐다볼 순 없는 일. 몇 분후. 그럴싸한 혜안이 하나 떠올랐다. 하루 더 연기하면 되는 것. 빛의 속도로 다시 일정을 조정하고 다시금 룰루랄라 애마를 남쪽으로 몰아갔다.
머피의 법칙은 우연하게 이어지는
불운의 대명사가 되어지고
그 혜안마져 산산조각이 나버린건 불과 몇 십분도 채 안된 시간. 그 바램은 제대로 빛도 보지못한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국립공원 공단에서 발송한 의문투성이의 또 다른 문자 한 통. 난, 그 메시지를 철저히 외면하고 싶었다. 받아들이기엔 나의 상심과 고통이 너무도 컸다. 입산통제가 하루 더 연장되었다 한다. 하루 더라니. 대피소 예약취소는 공단에서 일괄 처리했단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니.
울고 싶은 심정으로 경남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바닥난 내 마음을 토해냈다. ARS로 자동연결되는 전화번호, 몇 번의 시도끝에 기여코 직원과 연결되었다. 자동녹음되니 언변을 조심하라는 멘트는 들은 둥 마는둥 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바탕 열변을 토했으나 되돌아온 건, 싸늘한 울림 뿐. 하늘의 뜻이라서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
모든 게 변명으로만 들려왔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별수가 없었다. 억울하면 기상청에 직접 전화해 보라는 그런 뉘앙스로만 들려왔다. 난, 마음이 비뚫어져 어떤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겐 줄리의 법칙이란 것도 한낱 사치일 뿐. 기상청인지 구라청인지도 마냥 귀찮아졌다.
소싯적 국민학교 시절, 소풍날만 되면 비가 와서 가뜩이나 들뜬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더니만. 학교터를 잡을 때 하필이면 승천하려는 이무기를 해코지해 가지고 해마다 안 좋은 일이 반복되는 거라는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난 어떤 말도 그져 비아냥으로만 들려왔다.
어린이날 점심무렵.
어렵게 수소문해 모처럼 지인들과 담양의 한 아담한 맛집에서 황칠백숙으로 끌어 오른 열기를 가라 앉혀야 했다. 그리고, 우중 산책이라도 해줘야 분이 풀릴 듯하여 가까운 광주호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호수는 고요속에 잠긴채 아무 말이 없었다. 뭇 생명들도 살리고 사람도 살려내는 귀한 존재들. 물론, 나의 심리 전담 치료사이기도 하다. 우울증엔 아주 특효약인.
간밤에 얼마나 강풍이 불어댔는지 아예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참느릅나무, 왕버들 가지들이 이리저리 찢기어 데크 바닥에 나뒹굴고 수마에 할퀸 상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애벌레들과 자연의 주인공들도 강풍과 빗방울 튕기는 소리에 놀라 어디론가 모두 피신을 해버렸는지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격정을 이곳에 토해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광주호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오히려 내 마음이 문제일테지. 정말 자꾸 집나가는 내 멘탈이 문제인걸까. 비는 오다마다를 두어시간 반복했고 운무도 무등산 산자락을 무심이 넘나들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니 차츰 바람도 자고 이따금씩 먹구름 사이로 조그마한 햇살들이 스며들어 가뜩이나 헝클어진 내 마음에 조금의 위로가 되어준다.
기상특보는 해제되고
드디어
지리산은 날 받아줄 준비가 되었다
쥐구멍에도 볕 든 날이 있다 했던가. 어느덧 축축하던 숲 속에도 햇볕이 뉘엿뉘엿 새어들고 있었다.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지리산 천왕봉은 날 받아줄 준비가 된 것인가. 나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바람 가득 실어 경남사무소에 또 전화를 감행해 보았다. 대답은 내일 새벽부터 산행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
설렘과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느라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가고 있었다. 곧바로 집으로 내달렸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출정가를 부르러 떠나야 했다. 또다시 하늘이 요술을 부리기 전에.
메마른 중년의 삶에 한가닥 희망을 실어 바람에 날려보냈다. 언제나 첫사랑의 느낌인 어머니 품속 같이 포근한 지리산을 향해 드디어 떠나갈 수 있게 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햇갈렸다. 난 순간 음유시인이라도 된냥 어깨가 들썩거리고 사바세계를 떠날 생각에 잔뜩 마음이 부풀고 있었다. 다시 줄리의 법칙이 되살아 난 듯 희망의 찬가가 울려 퍼지기 직전이었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님이 부르신 지리산 찬가의 그 찬란한 천왕봉 일출이 아니어도 좋았다. 물론 언감생심 벽소명월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다만 천왕봉과 지리산 마루금에 내 두발이 그져 닿을 수 있기만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살포시 밟고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말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시려면
뼈까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지리산 시인 이원규
중년의 나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린 새로운 도전.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지만 성패 여부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순전히 나를 위한 도전이자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였기에. 그 멀고 힘든길에 철학과 수행이란 걸 하나 얹어 가고 싶었다. 동안 기다림이 길어지니 점점 내 마음에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던 것. 기다림의 시간은 지난했던 내 삶의 연장선상과도 얼추 맥락이 닿아있었다. 기다림을 속으로 녹이며 삼키다 보니, 진정 기다림의 맛을 느낄 수 없었던 것.
토요일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일요일 딱 하루 뿐. 밤, 어스름의 시간은 너무 더디게만 다가왔고 마음이 떨리고 요동쳐 왔다. 새벽 3시, 일찍이 짐을 꾸렸다. 옆지기님과 난, 앞서거니 뒷서거니 새벽 어둠을 갈랐다. 이미 서쪽하늘 귀퉁이에 걸려있던 하현달이 날 마중하듯 나와 있었다. 내 애마는 벽소령이 먼발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음정마을에 세웠고 옆지기님 차를 얻어 타고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로 향했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여러분들의 산꾼들이 설렘들을 가득 안고 출발 준비 중에 여념이 없었다. 옆지기님이 떠난 자리에는 가늘한 떨림만 남았고 난 드디어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들마다 연두색으로 하나둘씩 물들어 가고있는 나무들을 보며 설레임 가득안고 드디어 출발이다. 우여곡절 끝에 첫발을 내딛는 이 느낌의 근원이 궁금했다. 설레임보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앞섰던 숱한 기다림들. 난, 그 궤도에서 잠시 이탈했던 것. 하지만 트랙에서 완전히 탈선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 참시를 참지못하고 안달했던 기억들이 조금 쑥스러워 졌다. 내가 지금 이 길을 걷게 된것도 기다림의 후과가 아니었을지 싶어졌다. 소싯적 잔잔한 기다림의 추억들이 생각났다. 소풍, 방학, 크리스마스, 입학, 명절, 생일 등등. 그땐 그 기다림의 시간이 이처럼 지옥같진 않았다.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채우고 흘러보내는 게 아닌 인내와 내면의 성숙 과정이란 걸 알기까지 이렇게 고뇌의 시간들이 흘러버리다니.
안절부절 했던 지난 일들을 지우려 노력해 보지만 나의 싸구려 멘탈관리는 여전했다. 처음부터 내 멘탈이 이토록 흔들리진 않았으리라. 대학졸업후 그 흔한 적응기간조차도 없이 사회라는 바다에 내던져졌던 그때부터가 아니었을지 추측만 할 뿐. 불과 얼마전까지 내 맨탈 잡아먹는 귀신이 회사동료이자 상관이었는데, 이젠 상대가 대자연을 상대로 바뀌었다.
별일 많은 출정식이 드디어 끝이났다. 이만하면 첫 단추는 무난하게 꿰매진 듯. 여행은 별일 많아야 한다지만 별일 하나 더 얹으려 깜빡하고 스틱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될 일. 지리산 영혼이 깃든 생명수는 쉼 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유유히 흘러갔다. 안개비도 가던 길에 유난히 야멸차게 내리친다. 가랑비에 옷 젖을까 염려되어 우의까지 챙겨 입었다.
기다림의 의미를 알기까지
기다림이 깊어질수록 인생의 진정한 향이 피어나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대간 마루금의 맛이 깊게 피어날거라며 혼자말로 쉼없이 중얼거리며 오른다. 찰랑거리는 계곡물소리가 마치 내 출정식에 마중 나온 수많은 인파처럼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파고든다. 철쭉 꽃망울에 사랑이 내걸리고 열정이란 두글자가 새겨진 듯 반짝거린다. 나의 출정식에 응원한다며 짝짝짝 박수소리처럼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희망의 찬가가 계곡 깊숙이 울려 퍼진다.
계속해서, 4화 멈추니까 행복이다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